육신대로 살면(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2. 복음의 내용
오늘은 어제에 이어 복음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롬1:17)
사도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이 복음을 들으면,
그 복음에서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고,
사람은 그것을 믿고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믿음을 갖게 됩니까.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복음을 설명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복음을 성경으로 확인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4가지 단락으로 구분해서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기로 약속하신대로,
1) 하나님의 아들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누구에게? :자기백성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마1:21, 요 1:11)
2) 자기백성들이 하나님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3) 이방인은 자기들에게 보내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줌(행1:22)
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내어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십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4가지 극적인 반전을 보게 됩니다.
그 반전은 버림을 받은 한 사람의 운명인데 이 운명이 과연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되면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를 각 단락대로 성경이 드러내는 의미들을 살펴 보면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주신 것으로 "한 마디로 내어주심, 하나님의 버림을 당하심과 다시 살리심을 받으심"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가슴아픈 일을 하셔야만 하는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무슨일이 있었는가?
우리가 그 마음을 안다면 우리의 삶이 참으로 아름다울 것입니다.
저는 오늘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에게 보내어진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었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죽음에 내어주었으며, 하나님은 죽임을 당한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실지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복음을 이렇게 전하면 너무 직설적이고 어려운 의미들을 설명되지 않고,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서술적이며 하나님의 사역의 이야기정도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사도가 전한 복음의 내용에 따라 전합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메시아 곧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고, 마침내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으며, 이방인은 그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은 메시아를 다시 살리셨고, 그를 믿는 자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왜?
라는 반격적인 질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패턴을 정리해보니 "창조", "타락", "약속", "버림과 죽음", "부활"이라는 패턴과 함께 그 주인공을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왜 복음이 중심이 되고, 복음 자체가 됩니까?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 이시지만 그 창조의 주된 역할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요1:1)이셨습니다.(삼위일체라는 복잡한 신학적인 의미들이 드러나는데 여기에서는 생략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고, 지은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라고 증언한 것처럼, 만물은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부터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지음을 받은 만물 가운데 사람은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부여된 두가지의 능력은 잘 살펴보면 정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닮음을 의미하는데 모양에서 속성까지 닮았다고 말합니다.
닮았다는 것은 같은, 동일한, 이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한다는 것은 능력을 의미하는데, 저는 이 주제에 이를때 소름끼치는 전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창조주의 능력에 따른 작품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다지 감동되지 않으려고 하는데, 다른사람은 감동하기도 합니다만, "능력"이라는 말에는 전율합니다.
모든 만물을 관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지식과 지혜,
2, 힘
3, 덕
이것중에 하나라도 모자라면 완벽한 관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물들과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서로 조화되지 않은 것들인데 조화를 이루고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다시말하자면,
지식이 있는 자가 지식이 없는 것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연약한 자가 무질서하고 힘이 넘치는 존재를 관리해야 합니다.
소통할 수 없는데 덕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것이 관리에 필요한 조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이런 조건들을 부여하신 다음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물을 지으신 다음,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음을 받은 사람을 만물과 함께 존재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은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존재!
저는 이 말을 되뇌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나는 스스로, 아니면 나의 존재 능력으로, 존재하게 되었을까? 라고 생각하다가 불현듯이 스쳐 지나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육신은 흙을 빚어 만들고 영혼은 무에서 불러낸 존재야"
저는 형용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내가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만들고 무에서 불러낸 존재?"
우리는 사도가 말한 복음의 내용을 더욱 명확하게 성경에서 찾은바 대로 그 의미들을 확대해석 적용해볼 때 복음은 누구든지 보내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되는 생명의 구원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의 말씀인 복음이 어떻게 사람으로 생명얻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서 복음을 들을 때마다 그 복음이 사람의 인식구조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적용되어지는 의미를 살펴보고 복음의 힘과 능력이 더욱 많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도록 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내용일 것이고, 전도자가 복음을 전할때 더욱 성령을 의지함으로 더 많은 구원자의 열매를 얻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음판에 기록한 편지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더욱 확실하게 증언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더욱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의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확고히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다시말하자면 사람이 구원을 얻는 복음을 듣고 이해하고, 반응하게 하려면 전하는 자가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판에 기록하는 자세로 전해야 한다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사람의 마음판에 기록되려면 피조물인 우리에게서 어떤 과정이 필요합니까?
먼저 전파된 복음이 듣는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어야 하고, 성령께서는 반영된 복음을 조명하셔서 듣는 사람으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지각을 갖도록 해 주시며, 이로 인하여 사람이 복음에 의해 반응하는 신앙고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조명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해함으로 왜곡되게 받아들여 결국은 믿음의 반응을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람이 복음을 어떻게 지각하고 반응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지 과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내용을 살펴 볼때 잘 이해 될 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요1:11)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도가 말한 대로라면 이스라엘의 대속 제물을 위하여 보내 주신 것이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하며, 창세전에 이 세상에 존재하기로 아담안에 계획되어진 작정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처음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범하였고, 그 죄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사망이 왔고, 그로 인하여 그의 모든 백성들이(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한 백성) 사망의 비참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저주를 받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주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마16:24, )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였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이 약속은 분명히 이방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 이방인은 구원을 위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안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아들들이(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복음서는 자기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요1:1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들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버리기 까지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이 자기에게 보내어진 메시아, 곧 성경에 미리 약속된 구원을 이방인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이방인에게로 넘겨지는 관계 확장이 시작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아들여 메시아를 인정했다면 이방인은 영원한 소외를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철저하게 왜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눈이 어두워 소경처럼 되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조명받지 못하였으며, 그 약속의 말씀을 왜곡하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를 범하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비밀에 대해서 닫혀 있었고, 그 비밀보다는 시내산의 율법이 그들을 더욱 교만하게 하였습니다.
사도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호소하도록 주신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그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어두워져서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를 무참히 짖밟아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버림과 같이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하심으로 버려 얼마동안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비참에 처하여 졌다고 말한 것입니다.(롬11:25)
이스라엘의 눈에는 자기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들을 해롭게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자기들의 율법을 왜곡하고 자기들을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오히려 핍박했씁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
두가지 이유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 곧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그들의 영혼에 새겨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분명히 주어졌지만 그들의 영혼에서는 성령의 조명하시지 않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곡해한 결과로 어두움에 처하여 진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구약성경) 해석하며 회당에서 설교를 듣고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진리의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재대로 모르고 있었으며, 심지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진 진리의 말씀에 따라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을 몰랐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나는지 상상이 안됩니다.
그러나 그런일이 실지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났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어진 하나님의 아들을 완악한 마음으로 내쳤으며 거절하여 이방인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단순한 말씀에 꼬끄라지지 않을 수 없는 한가지 비참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이스라엘과 우리 이방인이라는 삼각 관계로서 우리와 하나님의 아들과 관계, 또는 이방인과 이스라엘과 관계입니다.
복음은 이 부분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창조적 관계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삶에서 얻어지는 결과적 열매로서 곧 하나님의 아들들 삶의 결과적관계이고. 하나님과 우리 이방인과의 관계는 허용적 관계(존재를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창조시 아담안에서 계획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결과적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창조적 관계로서 아담안에 계획된 열매로서의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과, 죄로말미암아 정욕을 일으켜 낳은 열매로서 이방인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었는데, 실지로 하나님께서 작정에 의해 존재하게한 사라의 몸에서 낳은 이삭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성취하려는 열심에서 비록하여 낳은 몸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마엘을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어 쫒아 버리도록 허락하셨고, 이삭의 몸에서 날 자들을 순수한 이스라엘의 가족으로 분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는 이를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종의 아들들인 이방인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불행한 존재였음을 말했습니다.(엡 2)
이방인들은 존재부터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고 삶에 대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그야 말로 비참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그에 대하 아무런 대가와 책임의무를 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존재하게 된 그 삶을 가진 것 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최대의 경의와 감사를 표해야 할 뿐입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의 존재는 이 창조 세계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죄만짓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여 흐트러 뜨릴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태어남으로 인하여 영혼을 가지게 되었고 영혼이 존재함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는데 그 영생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영혼이 죄의 본질로 존재하고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심각하게 파괴하고 무질서하게하며 망가뜨리는 존재일 뿐이므로 하나님의 세계에서 나타나지 못하도록 영원한 지옥에 가두어 두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는 존재함으로 영원한 고통과 불행을 앉고 태어난 그야 말로 불행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을 잘모르고 있거나 무시해 왔습니다.
소위 영적이라는 의미로 구원받은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창세전에 작정된 구별되어진 존재라는 정말로 이해가 안되는 괴상한 논리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적용해 왔습니다. 이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작정의 교리를 왜곡하여 이방인이면서 태어날때부터 구별되었다는 이스라엘적 의식으로 사도 바울의 말을 심각하게 곡해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창조적 작정을구별하시는 작정으로서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작정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창조적 관계에서 작정을 창조적 작정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작정을 하나님아버지께서 창조로부터 죄로말미암은 구속을 일임하시는 맡김과 엄밀히 구분되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와 성경이 분명히 구별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구별하는 것을 철저히 무시했고, 완전히 우리식 성경해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므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이방인 중심으로 연결지어 하나님과의 영적으로 특별한 관계를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세번째 단락인 우리의 존재에 관하여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우리는 쓰레기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철저히 구별되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쓸모없는 버러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있어서 어떤 관계입니까?
사도는 우리의 정체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박의 사람들이라,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세상에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이세상에 태어났는데 아무런 약속을 가지지도 못한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단순히 아브람과 같은 존재인데 하나님의 약속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부터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우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왜면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복음에 감추어져 있는 이 비밀을 파해쳐야 합니다.
이 비밀을 알면 아무도 이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사도는 증거합니다.
우리의 본 정체를 종의 아들입니다.
아브람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과, 이약속을 인간적 방법으로 성취하려고 해서 얻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서는 한태에서 두 사람이 낳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사람인 반면 다른 사람은 태어나면서 버림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두 종류의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하는데 가인과 같은 사람과 아벨과 같은 사람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성경의 주장에 의하면 이방인인 우리는 가인, 이스마엘, 에서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벗어난 탄생때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욕이 아니면 이 세상에 태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야 말로 죄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내어준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들이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이 단락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은 묵상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실질적인 사형집행자들이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는 지음을 받은후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소통이 있었습니다. 창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이스라엘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이방인에게 내어주기 이전까지 이스라엘과만 소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중에는 이방인이 없었고, 이방인에게는 만물에게 주어지는 제한적인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본질상 그들은 죄로부터 말미암았으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허용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복음이나 말씀들이 그들에게 들려지고 영혼에 반영되어도 그 의미를 진리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방인은 창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순히 죄의 결과물들이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며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롬5:10, 골 1:21)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권리를 빼앗김으로 자기의 뜻으로 죄인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 권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버렸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은 곧 죄에게 내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싸우시되 투쟁하시지 않으시고 평화와 진리로 대항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군대를 동원하여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희생으로 승리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군대를 동원하여 짖밟는 것이나 채찍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 행위를 보고 꼬끄라지게하는 것입니다.(행 5:30)
베드로 사도가 이 말로 증언할 때 이스라엘은 완악하여져서 사도를 옥에 가두고 이 말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이방인들이 이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임하셔서 구원의 큰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네 번째 하나님께서는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보내심을 받은 것은 최초에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땅이 범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없애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시고 통치하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아들의 권세 아래 있고 아들은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하는 일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그 이루시는 선으로 인하여 즐거워하시고 계십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2. 복음의 내용
오늘은 어제에 이어 복음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롬1:17)
사도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이 복음을 들으면,
그 복음에서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고,
사람은 그것을 믿고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믿음을 갖게 됩니까.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복음을 설명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복음을 성경으로 확인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4가지 단락으로 구분해서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기로 약속하신대로,
1) 하나님의 아들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누구에게? :자기백성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마1:21, 요 1:11)
2) 자기백성들이 하나님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3) 이방인은 자기들에게 보내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줌(행1:22)
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내어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십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4가지 극적인 반전을 보게 됩니다.
그 반전은 버림을 받은 한 사람의 운명인데 이 운명이 과연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되면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를 각 단락대로 성경이 드러내는 의미들을 살펴 보면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주신 것으로 "한 마디로 내어주심, 하나님의 버림을 당하심과 다시 살리심을 받으심"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가슴아픈 일을 하셔야만 하는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무슨일이 있었는가?
우리가 그 마음을 안다면 우리의 삶이 참으로 아름다울 것입니다.
저는 오늘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에게 보내어진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었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죽음에 내어주었으며, 하나님은 죽임을 당한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실지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복음을 이렇게 전하면 너무 직설적이고 어려운 의미들을 설명되지 않고,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서술적이며 하나님의 사역의 이야기정도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사도가 전한 복음의 내용에 따라 전합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메시아 곧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이고, 마침내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으며, 이방인은 그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은 메시아를 다시 살리셨고, 그를 믿는 자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왜?
라는 반격적인 질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패턴을 정리해보니 "창조", "타락", "약속", "버림과 죽음", "부활"이라는 패턴과 함께 그 주인공을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왜 복음이 중심이 되고, 복음 자체가 됩니까?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 이시지만 그 창조의 주된 역할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요1:1)이셨습니다.(삼위일체라는 복잡한 신학적인 의미들이 드러나는데 여기에서는 생략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셨고, 지은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라고 증언한 것처럼, 만물은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부터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지음을 받은 만물 가운데 사람은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부여된 두가지의 능력은 잘 살펴보면 정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닮음을 의미하는데 모양에서 속성까지 닮았다고 말합니다.
닮았다는 것은 같은, 동일한, 이런 것이 아닙니다.
또한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한다는 것은 능력을 의미하는데, 저는 이 주제에 이를때 소름끼치는 전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창조주의 능력에 따른 작품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다지 감동되지 않으려고 하는데, 다른사람은 감동하기도 합니다만, "능력"이라는 말에는 전율합니다.
모든 만물을 관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지식과 지혜,
2, 힘
3, 덕
이것중에 하나라도 모자라면 완벽한 관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물들과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서로 조화되지 않은 것들인데 조화를 이루고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다시말하자면,
지식이 있는 자가 지식이 없는 것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연약한 자가 무질서하고 힘이 넘치는 존재를 관리해야 합니다.
소통할 수 없는데 덕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것이 관리에 필요한 조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이런 조건들을 부여하신 다음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물을 지으신 다음,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음을 받은 사람을 만물과 함께 존재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은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존재!
저는 이 말을 되뇌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나는 스스로, 아니면 나의 존재 능력으로, 존재하게 되었을까? 라고 생각하다가 불현듯이 스쳐 지나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육신은 흙을 빚어 만들고 영혼은 무에서 불러낸 존재야"
저는 형용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내가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만들고 무에서 불러낸 존재?"
우리는 사도가 말한 복음의 내용을 더욱 명확하게 성경에서 찾은바 대로 그 의미들을 확대해석 적용해볼 때 복음은 누구든지 보내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되는 생명의 구원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의 말씀인 복음이 어떻게 사람으로 생명얻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서 복음을 들을 때마다 그 복음이 사람의 인식구조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적용되어지는 의미를 살펴보고 복음의 힘과 능력이 더욱 많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도록 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내용일 것이고, 전도자가 복음을 전할때 더욱 성령을 의지함으로 더 많은 구원자의 열매를 얻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음판에 기록한 편지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더욱 확실하게 증언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더욱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의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확고히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다시말하자면 사람이 구원을 얻는 복음을 듣고 이해하고, 반응하게 하려면 전하는 자가 복음을 듣는 자의 마음판에 기록하는 자세로 전해야 한다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사람의 마음판에 기록되려면 피조물인 우리에게서 어떤 과정이 필요합니까?
먼저 전파된 복음이 듣는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반영되어야 하고, 성령께서는 반영된 복음을 조명하셔서 듣는 사람으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지각을 갖도록 해 주시며, 이로 인하여 사람이 복음에 의해 반응하는 신앙고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조명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해함으로 왜곡되게 받아들여 결국은 믿음의 반응을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람이 복음을 어떻게 지각하고 반응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지 과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내용을 살펴 볼때 잘 이해 될 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요1:11)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도가 말한 대로라면 이스라엘의 대속 제물을 위하여 보내 주신 것이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하며, 창세전에 이 세상에 존재하기로 아담안에 계획되어진 작정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처음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범하였고, 그 죄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사망이 왔고, 그로 인하여 그의 모든 백성들이(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한 백성) 사망의 비참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저주를 받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주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마16:24, )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였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이 약속은 분명히 이방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 이방인은 구원을 위한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안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아들들이(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복음서는 자기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요1:1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들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버리기 까지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이 자기에게 보내어진 메시아, 곧 성경에 미리 약속된 구원을 이방인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이방인에게로 넘겨지는 관계 확장이 시작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아들여 메시아를 인정했다면 이방인은 영원한 소외를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철저하게 왜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눈이 어두워 소경처럼 되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조명받지 못하였으며, 그 약속의 말씀을 왜곡하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를 범하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비밀에 대해서 닫혀 있었고, 그 비밀보다는 시내산의 율법이 그들을 더욱 교만하게 하였습니다.
사도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호소하도록 주신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그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어두워져서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를 무참히 짖밟아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버림과 같이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하심으로 버려 얼마동안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비참에 처하여 졌다고 말한 것입니다.(롬11:25)
이스라엘의 눈에는 자기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들을 해롭게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자기들의 율법을 왜곡하고 자기들을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오히려 핍박했씁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
두가지 이유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 곧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그들의 영혼에 새겨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분명히 주어졌지만 그들의 영혼에서는 성령의 조명하시지 않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곡해한 결과로 어두움에 처하여 진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구약성경) 해석하며 회당에서 설교를 듣고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진리의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재대로 모르고 있었으며, 심지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진 진리의 말씀에 따라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을 몰랐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나는지 상상이 안됩니다.
그러나 그런일이 실지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났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어진 하나님의 아들을 완악한 마음으로 내쳤으며 거절하여 이방인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단순한 말씀에 꼬끄라지지 않을 수 없는 한가지 비참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이스라엘과 우리 이방인이라는 삼각 관계로서 우리와 하나님의 아들과 관계, 또는 이방인과 이스라엘과 관계입니다.
복음은 이 부분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창조적 관계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삶에서 얻어지는 결과적 열매로서 곧 하나님의 아들들 삶의 결과적관계이고. 하나님과 우리 이방인과의 관계는 허용적 관계(존재를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창조시 아담안에서 계획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결과적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창조적 관계로서 아담안에 계획된 열매로서의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과, 죄로말미암아 정욕을 일으켜 낳은 열매로서 이방인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었는데, 실지로 하나님께서 작정에 의해 존재하게한 사라의 몸에서 낳은 이삭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성취하려는 열심에서 비록하여 낳은 몸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마엘을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어 쫒아 버리도록 허락하셨고, 이삭의 몸에서 날 자들을 순수한 이스라엘의 가족으로 분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는 이를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종의 아들들인 이방인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불행한 존재였음을 말했습니다.(엡 2)
이방인들은 존재부터 죄의 정욕으로 말미암고 삶에 대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그야 말로 비참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그에 대하 아무런 대가와 책임의무를 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존재하게 된 그 삶을 가진 것 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최대의 경의와 감사를 표해야 할 뿐입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의 존재는 이 창조 세계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죄만짓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여 흐트러 뜨릴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태어남으로 인하여 영혼을 가지게 되었고 영혼이 존재함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는데 그 영생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영혼이 죄의 본질로 존재하고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심각하게 파괴하고 무질서하게하며 망가뜨리는 존재일 뿐이므로 하나님의 세계에서 나타나지 못하도록 영원한 지옥에 가두어 두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인 우리는 존재함으로 영원한 고통과 불행을 앉고 태어난 그야 말로 불행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을 잘모르고 있거나 무시해 왔습니다.
소위 영적이라는 의미로 구원받은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창세전에 작정된 구별되어진 존재라는 정말로 이해가 안되는 괴상한 논리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적용해 왔습니다. 이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작정의 교리를 왜곡하여 이방인이면서 태어날때부터 구별되었다는 이스라엘적 의식으로 사도 바울의 말을 심각하게 곡해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창조적 작정을구별하시는 작정으로서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작정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창조적 관계에서 작정을 창조적 작정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작정을 하나님아버지께서 창조로부터 죄로말미암은 구속을 일임하시는 맡김과 엄밀히 구분되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와 성경이 분명히 구별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이방인과 구별하는 것을 철저히 무시했고, 완전히 우리식 성경해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므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이방인 중심으로 연결지어 하나님과의 영적으로 특별한 관계를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세번째 단락인 우리의 존재에 관하여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우리는 쓰레기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철저히 구별되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쓸모없는 버러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있어서 어떤 관계입니까?
사도는 우리의 정체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박의 사람들이라,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세상에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이세상에 태어났는데 아무런 약속을 가지지도 못한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단순히 아브람과 같은 존재인데 하나님의 약속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부터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우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왜면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복음에 감추어져 있는 이 비밀을 파해쳐야 합니다.
이 비밀을 알면 아무도 이 구원에서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사도는 증거합니다.
우리의 본 정체를 종의 아들입니다.
아브람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과, 이약속을 인간적 방법으로 성취하려고 해서 얻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서는 한태에서 두 사람이 낳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사람인 반면 다른 사람은 태어나면서 버림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두 종류의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하는데 가인과 같은 사람과 아벨과 같은 사람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성경의 주장에 의하면 이방인인 우리는 가인, 이스마엘, 에서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벗어난 탄생때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욕이 아니면 이 세상에 태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야 말로 죄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내어준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들이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은 이 단락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은 묵상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실질적인 사형집행자들이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는 지음을 받은후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소통이 있었습니다. 창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이스라엘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이방인에게 내어주기 이전까지 이스라엘과만 소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중에는 이방인이 없었고, 이방인에게는 만물에게 주어지는 제한적인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본질상 그들은 죄로부터 말미암았으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허용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복음이나 말씀들이 그들에게 들려지고 영혼에 반영되어도 그 의미를 진리대로 알 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방인은 창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순히 죄의 결과물들이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며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롬5:10, 골 1:21)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권리를 빼앗김으로 자기의 뜻으로 죄인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 권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버렸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은 곧 죄에게 내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싸우시되 투쟁하시지 않으시고 평화와 진리로 대항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군대를 동원하여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희생으로 승리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군대를 동원하여 짖밟는 것이나 채찍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 행위를 보고 꼬끄라지게하는 것입니다.(행 5:30)
베드로 사도가 이 말로 증언할 때 이스라엘은 완악하여져서 사도를 옥에 가두고 이 말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이방인들이 이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임하셔서 구원의 큰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네 번째 하나님께서는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보내심을 받은 것은 최초에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땅이 범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없애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권세를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시고 통치하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아들의 권세 아래 있고 아들은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하는 일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그 이루시는 선으로 인하여 즐거워하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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