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으로 살면 "롬 8:13"
"너희가 육신으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경건에 이르는 삶,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목적은 “믿음”이기도하고 “구원”이기도 하며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 “구원” “의”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거룩함”에 있습니다(벧전 1:16). “거룩함”이란 성별되는 것, 신에게 바쳐진 것, “세상 것인데 신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경건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거룩함”에 직접 이르지 못합니다. 다만 거룩함에 이르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인 “경건한 삶”에 이르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신자가 경건한 삶을 살 때 비로서 신자에게서 거룩함이 드러납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영어로 piety 입니다. 이 말의 헬레어는 ευσεβης = ευ + σεβω 입니다. 앞의 ευσεβης 는 경건하다라는 말이고 ευ Well “잘” 이라는 의미이고 σεβω, Worship "예배하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이라는 말은 “예배를 잘 드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예배를 잘 드린다고 하는 말은 교회로 모인 사람들이 정한 예배 시간에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는 “경배하다” “예배하다”라는 같은 말입니다. 예배는 정한 시간에 모두 함께 모든 삶의 양태의 행동을 중단하고 일률적으로 행하여지는 의식 행위로 이해 됩니다. “경배하다”라는 말은 일률적이지 않고 개인적이며, 부여된 시간에 적용하는 의미라기 보다는 일상 생활 속에서 신자가 취하는 행동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 예배가 집단적인 의식인 반면 경배는 개인적인 의식의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예배와 경배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이 말의 진실한 의미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리로 나 자신을 살피고 그 분을 높이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교회에 공동으로 집단으로 예배를 드릴 때, 소모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직장 생활을 할 때, 항상 예배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경건한 삶은 복음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이고 경건은 신앙의 모든 것이고, 경건으로 인해 거룩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경건으로 나타나는 거룩은 자기 스스로 거룩하다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반드시 객관적인 판단으로 비롯되기 때문에 전적으로 타인의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거룩하다고 판단할 때 거룩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스스로 거룩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오만이고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는 거룩의 광채를 스스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스스로 거룩하심을 보실수 있을 뿐, 사람으로서는 결코 자신의 거룩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신자의 영혼의 지성에서 빛이 육체로 반영되어 나타나는 광채입니다. 신자에게 거룩함이 드러나려면 가장 먼저 진리가 신자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고 그 진리가 빛을 발하고 육체의 의지가 진리의 빛을 가리우지 않아야 합니다. 경건은 진리를 순종함으로 신자가 행하는 내 외적인 행위로서 육체의 의지를 꺽는 일을 합니다. 영혼의 지성에는 삶속에서 얻은 모든 지식이 타락한 영혼의 지성에 새겨두었고 그 지성들이 조건에 따라 의지를 일으킵니다. 이 의지는 육체 욕구의 노예가 되어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경향입니다. 이 경향은 영혼의 지성에 새겨진 것만큼 많은 욕구를 일으키고 사람은 육체의 욕구에 아주 친숙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혼의 본래의 의지가 파괴되고 부패하여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 복음의 진리 지식은 거룩한 하나님의 진리 지식으로 영혼의 지성에 새겨졌습니다. 영혼의 지성에는 육체로부터 얻은 온갖 지식들로 가득체워져 있는데 유일하게 진리의 지식이 새겨졌고 그 진리의 지식에 의해 영혼은 의지를 일으켜 마음에 반영됩니다. 이런 순간이 복음의 내용에 따라 순종하려는 사람의 의지입니다. 이런 삶이 경건의 시작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입니다. 이때 수많은 육체에서 반영된 지식들이 의지를 일으켜 마음에 반영시키면 진리의 지식에서 비롯된 영혼의 의지가 억눌림을 당합니다. 이처럼 마음에는 두개의 의지가 일어나 함께 반영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에서 반영되어 새겨진 지식에 의한 의지, 다른 하나는 복음의 진리 지식에 의한 의지입니다. 이 두 의지가 마음에 반영되어 자기의 의지가 실행되기를 원하는데 육체의 의지는 당연히 욕구이며 정욕이고 진리의 지식에 의한 의지는 경건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육체의 욕구에 의해 경건한 의지가 밀려나고 오랬동안 길들여진 욕구를 따라 행동하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경건의 의지는 영혼의 지성에 새겨진 수가 많지 않아 육체의 의지에 짖눌려 거의 실행되지 않습니다. 더우기 신앙이 연약한 사람에게 있어서 경건의 의지는 곧 바로 육체의 의지에 의해 밀려나고 마음의 한구석에서는 진리의 의지에 순종하려는 경향성만 남아 마음이 갈등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내적인 갈등이 약하게 일어나는 장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의 빛이 밝혀진다고 해도 육체의 의지가 영혼의 등불을 덮어버리므로 육체에 반영되지 않고 육체는 욕구를 더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사람에게는 육체의 의지가 진리를 가로막지 못함으로 영혼의 지성에서 발하는 진리의 빛이 육체에 반영되어 찬란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희미하게 빛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점차 진리의 지식이 추가되어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고 그 수가 많아지며 육체의 의지가 진리에 의해 꺾어진다면 어느날 아주 찬란한 빛을 육체에 반영시키게 되고 이런 사람이 많아짐으로 온 지구상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 빛이 육체에 반영되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 선생은 디도에게 보내는 글에서 자신이 무엇을 위해 교회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말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과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택하진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딛1;1)”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신자들에게 경건함에 이르게 하고 결국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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