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대로 살면

죄의 발견(롬 7:7).

생명있는 신앙 2011. 7. 25. 16:57

1) 죄란 무엇인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롬 7:7)”

바울 사도는 “죄”가 “죄”되게 하는 시기를 율법이 왔을 때라고 말합니다. 물론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있었으나. “죄”가 “죄”로 드러나는 그 시기는 비로써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는 있었으나 “죄”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계명이 이르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라고 말함으로 죄에 의해 사람은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죄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으로 사람을 지배함으로 모든 사람들을 율법 아래에 있게 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일을 하지 못할 때 그 사람을 죄로 정죄 받고 율법대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심판에 이르게 된 것을 스스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아담의 타락이후 오랬 동안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아 오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땅에 생명을 부지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오기 전 사람들은 어떤 이유든지 정죄를 받아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었고 죽음에 관한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실지로 당시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였으나 뒤에 알기에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죽음에 이른 상태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율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의 얼굴에 비췬 광채가 사람을 향하여 비춰 사람으로 자신의 상태를 보도록, 마치 자신들의 상태를 거울 비취듯이 확실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사람 앞에 나타나 밝은 거울처럼 사람을 드러냈습니다. 거울 안에 비췬 자신을 율법을 통해 비춰 보았을 때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자기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고 그 거울에 비췬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가 한결같이 죽은 모습이라는 사실을 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율법으로 비춰 보면 생명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정죄하여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비로써 율법이 사람들을 죽이는 강력한 무기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죄”였던 것입니다. 율법에 비췬 사람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죄였습니다.

John Owen 목사는 on Indwelling sin in Believers 라는 책에서 죄의 공식적인 적대적인 대상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 사상에서 저의 신앙의 사상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책을 잘못 읽고 있었는가? 생각하고 원저를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Owen 목사님이 그처럼 말씀을 하셨단 말인가? 라는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여전히 사실이었습니다. 그 번역은 바른 번역이었고, 그 말의 의미는 “하나님은 죄의 공격 대상이라고 기록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놀라운 생각을 했습니다.

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의 공격을 당하신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에 손상을 입고 실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 ”공격했다“는 그 한마디의 말로 인해 하나님의 명예가 현저하게 손상을 입으신다는 사실 앞에 저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단 마귀가 하나님을 공격할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공격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이 흠을 입을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John OWen 목사님도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에 사단과 마귀가 아무리 힘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할만한 능력과 힘을 전혀 갖지 못합니다. 만약 사단과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영예가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을 것이며 그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빼앗기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패할 것은 분명한데 상대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닙니까? 그는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가 아닌가요? 그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우리를 혼돈스럽게 하지 않습니까? 지음을 받은 존재가 아무리 능력이 크다 하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아무리 논리를 펼쳐도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사 피조물인 사단과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셨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가 활시위를 당겨 하나님을 향하여 쏘았다고 가정하겠습니다. 힘껏 젖 먹던 힘을 모두 보태 활시위를 당겼다가 살을 붙잡은 화살의 깃털을 날려 보내려고 줄을 튕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화살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고 힘껏 날아갔으나 아무리 날아가도 하나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어떤 공격으로도 하나님보다 더 작은 세계가 결코 하나님의 옷자락 끝에 닿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이도록 해도 공격하는 사단과 마귀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의 경향이 결코 하나님을 대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대적이 될 수 있다면 만물이 무에서 창조되었으며,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피조물 스스로 붙드시는 ‘말씀을 떠나 스스로 허무로 돌아가게 유혹’하는 일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허무로 향하는 힘이 있어 하나님을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처럼 군대를 모을 수 있습니까?

허무가 스스로 무를 향하여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무에서 부르셨고 만물은 존재 자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렇지만 만물은 존재 자체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를 향하여 돌아가려고 합니다.

존재가 무로 돌아가려는 경향은 아주 간단합니다.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생명은 말씀에서 유지되어집니다. 피조물이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생명이신 말씀을 자신에게서 거절하는 것이므로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무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지에 이끌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필연적으로 무를 향하여 돌이켜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 한 것인가?

 

2) 죄의 발견

(내가 어디까지 온 것인가?

영혼의 깊은 세계를 향하여 질주한 이 걸음 돌이키지 못하는 길인가?

아니면 더 나아가도 문제가 없는 길인가?

나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너무 깊이 들어 왔나?)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7:9)”

바울은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하던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가 어느 시점을 의미하는 말씀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의 최고의 학문을 배우고 수련하고 있었던 때를 말하는지, 아니면 율법을 전혀 알지 못하던 어린 아이 때를 말하는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난 이후의 어느 시점인지, 아니면 바울 자신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을 대표해서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기 이전의 시기를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 관하여 많은 신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학문적 논의가 활발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살았더니”는 죄와 대비해서 자신의 인격적 주관에 관한 지배가 자신에게 있는지 아니면 죄에 있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나를 지배한다는 표현은 옳지 않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지배할 수 없고 자신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말하는 자 의지적인행위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죄가 나를 지배한다는 말은 자기의 모든 행위가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로마서 7:17,20)”라는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스스로 자기의 의지에 따라 살도록 지음을 받았으나,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원하지 않은 다른 소스가 공급되어 선한 의지가 왜곡된 의지를 일으켜 본래의 사람의 행위가 아닌 다른 행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행위는 의지가 아닌 별도의 행위를 이끄는 또 다른 의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의지에서 비롯되는데 의지에 행위에 대한 소스는 영혼의 지성에서 제공합니다. 사람은 한 영혼에 한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행위는 한의지에서 비롯되고 모든 행위의 원천 소스인 지식은 영혼의 지성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바 ‘살았을 때는 죄는 죽었고, 죄가 살았을 때는 내가 죽었다’는 의미는 자신의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난 일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았을 때”

이때는 모든 사람이 부패한 상태에 있고,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본유적 지식이 없으므로 경험적 지식만 있을 때입니다.

이 사람이 ‘살았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경험적 지식에 의존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았다’는 표현은 무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죽어 있는 상태로서 본유적 지식이 없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떠나 자기의 경험적 지식에 따라 사는 타락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부여하신 율법이 오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비록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타락한 범죄인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죄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모르는 아브라함에게 죄를 적용하여 자신이 죄인 깨달았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았다’고 표현한 것은 아담의 타락과 관계해서 죄의 상태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지도 못하는 자연적 본성대로 사는 사람(경험적 지식을 본성으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율법이 태양에서 내리 쬐이는 빛처럼 강력하게 비췄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었습니다. 이 빛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때 자신의 모습에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고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죄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사람을 지배하게 하였고 얽매여서 자유를 빼앗아 간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정죄에 이르게 될 때 죄는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앗아가 버렸으므로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비참하게도 이스라엘의 이런 비극적인 처지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계속되었고 바울의 삶 가운데 다메섹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율법 아래 매여 죄의 노예로 살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7:9절에서 “내가 살았더니”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삶을 말한 것이지만 그 의미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기 이전을 표현한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아닙니다.

이 얼마나 정확한 표현입니까?불신자들이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에게 비춰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연적 본성으로 살고 있고, 윤리와 도덕에 관한 규범이 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경험적 지식에 의한 것으로 스스로를 죄에 관한 판단을 할 규범에 적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들의 마음에 희미하게 비취고 있는 양심만이 마음에 무거움을 줄 뿐 죄라는 판단을 갖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에 비췸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는 판단에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은 자신을 지배하는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무엇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철저히 자신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도덕은 사회적 규범 보다 자신의 양심을 더 우선적으로 적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자신에게 있으며, 그 이상 행위로 인하여 타인에게나 사회적인 범죄 행위에 관하여는 사회를 지배하는 지배자에게 판단을 받게 되었으므로 자기 자신의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규범을 침해하는 범죄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죄라고 규정할 만한 행동이나 행위에 대해서 인정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기 전, 혹은 율법이 있을 지라도 그 의미를 분명히 깨우치고 알기 전까지, 심지어 율법을 알고 율법의 온갖 요구에 철저하게 지켜 살았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의 삶, 혹은 자신과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죄와의 관계를 알지 못하던 그 때를 자기가 ‘살았던 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를 내가 율법에 대한 지식을 버림으로 해서 죄를 지었을 때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의 죄가 잠잠하여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한편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생며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서, 나는 나 자신을 만족 하였다. 이와 같이 율법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자기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올바로 알지 못하던 때,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지 아니하던 때를 말하여 자기 자신이 ‘살아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경험적 지식으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의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영혼 깊은 곳 지성이라는 방안에서부터 시작 되었으므로 사람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자기 자신에 관하여서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에서 완전히 떠나 있는 상태가 되어 있고 이런 상태를 일컬어 타락의 상태 원죄의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로므로 원죄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적 지식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경험적 지식의 상태로 스스로 돌아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경험적 상태로부터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범죄 상태의 행위입니다. 바울이 말한 ‘살았 더니“라는 의미는 본유적 지식을 소유한 상태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으로 살고 있고, 율법의 비췸으로 깨우침을 받기 이전까지의 모든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로마서 7:9은 자범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원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자범죄를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원죄를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까? 라는 의문과, 이방인은 율법조차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반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았으며 율법을 알고 있다면, 이스라엘인 영혼의 지성에는 하나님과 율법에 관한 지식이 새겨져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대인들을 구별하시면서 그들 영혼의 지성에 변화를 주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이 타락한 상태(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적 지식을 상실한 상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태는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동일한 타락의 상태에 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10:12)” 라고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전혀 구별이 없는 본성에서 타락한 경험적 지식으로 있을 때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신 것은 은혜를 베푸신 것뿐이고, 그 은혜가 율법으로 나타났고, 은혜를 주심으로 인하여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영혼의 지성에 빛을 비추어 주신 주권적인 사역일 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일이 특별한 역사로 인하여 이스라엘인들의 육체와 영혼의 실재에 변화를 주신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선민의식과 같은 독특성을 주장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표식이 없고 오직 그들에게 순종만이 요구 될 뿐인데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특별한 표식인 할례도 그들의 순종으로 구별된 그들의 의의 결과일 뿐 하나님께서 친히 구별한 결정적인 신적인 표식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은혜를 받았다 해서 더 중한 죄에 대한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그들이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가중한 벌로서 죄에 대한 처벌이 당연하지만 은혜로 말미암아 죄의 경중이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가 살아나고]

‘죄가 살아났다’는 것은 얼굴을 들고 모습을 드러낸 것을 말합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죄가 계명이 이르매 보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죄가 보인다’는 것은 육체의 오감으로 느끼는 감각이 아닙니다. 이는 영혼의 지성이 율법이라는 지식에 의해 죄를 발견하고 그 발견된 지식의 감각이 영혼의 감성에서 감각 되는 것입니다. 죄는 영혼의 지성에서 발견되는 그 때에 죄가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의 모습을 감추고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죄에 대한 지식이 결여함으로 인해 죄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지성에 발견되기 이전에도 죄는 있었고, 자기의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사람으로 발견하지 못하도록 숨긴 상태에서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영혼이 직접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계명을 조명하여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가질때 그 계명의 지식이 사람에게서 작용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미 죄의 지식으로 가득채워져 있기 대문에 하나님의 지식인 계명을 죄된 지식으로 조명하여 사람의 자기지식을 생성합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기 지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계명을 진리대로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질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식을 진리 그대로 생성하여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그 진리의 조명이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을 받아 지식을 가지는 것이지만 죄로 말미암아 진리의 지식이라고는 1점도 생성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도록 조명해줄 수있는 지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결국 타락한 사람안에는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 진리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조명해주는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성령께서 조명해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계명이 듣거나 봄으로 감각되면 그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 들어오고 지성안에서 성령께서 조명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동일한 지식을 지성이 생성하여 가집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여 생성한 지식은 진리의 지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진리의 지식의 눈으로 자기안에 있는 자신의 지식을 볼때 모두가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지난날 동안 살아온 모든 삶이 진리의 삶이 아니라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주신 계명이 사람의 영혼에 이르게되면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들은 죄가 자기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모습을 자기안에서 상대적으로 볼수 있게 되고 스스로 그 죄를 경계하고 죄에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자기자신이 스스로 개우치되 무지의 폐해가 얼마나 비참한가에 대해서 세삼 알고 ‘무지’속에 둥지를 틀고 자기를 숨기고 있는 죄를 보고 그것이 옛 자신의 모습임은 보고 애통해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인 모든 지식안에 의미로 함유하고 있는 무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무지 속에서 쾌락을 누리고 즐거움을 맛보며 머물게 합니다. 조금이라도 지식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최후까지 지식이 지식의 자리에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지식으로 가장하고 지식의 자리를 선점하고 있습니다. 그 지식으로 참된 지식과 대항하여 싸우고 참된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바 죄를 깨닫게 하는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율법을 왜곡되게 믿었고 수정하였으며 고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율법이 율법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이방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 하나님은 자기들의 하나님과 다르다는 생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왜면했습니다. 그들의 지식이 참된 진리를 완강하게 거절한 것입니다. 원인은 그들의 영혼의 지성에서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판단하는 지식들이 있었습니다.

불신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관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님이 아니고, 선량한 사람들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이며 등등의 이유를 붙여 자신과 관계없는 신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 영혼은 하나님에 관하여 의문시 될 때 지성에 있는 지식들이 하나님을 게시하고 감성은 지성이 게시한 하나님을 지각함으로 참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을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일이 없습니다. 본래 사람이 타락한 이후 그들의 지성에 알려진 하나님께 잘못을 범한일이 없기 때문에 죄에 대한 감각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알지 못합니다. 겨우 그들이 느끼는 죄는 사회적 관계에서 우발적으로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한 사회에 반한 행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들의 신에게 결코 범죄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지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계명이 이르매]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계명이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경험일 수 있고 그리스도인의 경험일 수 있습니다. 특히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만 이 계명이 이르렀고 그 계명이 사람 영혼에 비춰지고 빛을 발하면서 지성에 새겨지게 됩니다(고후3:3).

하나님의 지식이 사람 영혼의 지성에 새겨지는 것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영혼에 새겨둘 수 없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의 지성에 새길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인치심이라고 말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에 의해 역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새기는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고(요한1서 5;17), 성령께서는 반드시 진리와 함께 사역하시고(요한복음 16:13) 그 새긴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고 새로운 지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지식이 사람의 영혼에 새겨질 때 비로서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진지한 모습을 직시할 수 있는 지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지식을 새기는 일은 오직 성령만이 하시는 선택적 사역이므로 이 사역이 있은 후라야 비로서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지게 되고 비로서 하나님과 관계한 자신을 알 수 있고 그때 이르러 자신의 죄를 깨달아 알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의 자신의 경험적 지식은 항상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비록 논리적으로 바르게 보이고 사람의 경험상 옳은 것일지라도 그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얻은 지식임으로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지식이 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 언제든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식이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육체를 신뢰하지 않은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얻게 됩니다.

[죄가 살아나고] 죄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유적 지식을 망실하고 자기 스스로 경험적 지식으로 사는 모든 삶이나 생성된 지식들로부터 행한 모든 행동을 죄라고 말합니다. 이 죄가 계명이 거짓된 본래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간단하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경험적 지식과 율법을 비교하여 보는 것입니다.

두 지식을 비교하면 지식의 목적이 분명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자기의 경험적 지식은 아무런 목적이 없습니다.

무엇위해 지식이 얻어졌으며 무엇을 위해 지식이 우리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단순히 살기 위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분명히 그 목적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거짓되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지식이 아닌 자기의 이성과 경험적 지식을 앞세워 인생을 펼쳐 가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영혼에 하나님을 말씀을 새기고 그 말씀이 사람을 지배하는 중심이 되도록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쳐 주지 않은 사람이 앞서서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할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말씀을 영혼에 새기지는 못하지만 말씀중심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만약 자기의 경험적 지식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주위에 하나님의 율법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 사람과 같이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경험적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것이며 만약 이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사람의 삶을 보면서 경험적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아간다면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 내어 나를 살리사 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한 영혼이 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완전한 삶을 경험적 지식으로 영혼에 새긴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한 그 말씀이 그의 영혼에 새겨짐으로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의 본유적 지식을 망실하고 자기의 경험적 지식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를 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삶이며 거짓된 삶이며 자기 중심적인 삶입니다. 영혼의 지성의 판단과 감성의 지각, 그리고 의지를 일으키는 욕구 등, 모든 것이 자기 경험적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같지 않은 세상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호색과 더러운 것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짖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이라(갈라디아 5:17~19)고 말했으며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사도가 발견한 죄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육체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육체의 사람은 하나님의 본유적 지식을 망실하고 경험적 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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