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전 교회에서 오랫동안 '하나님 말씀에 의해 거듭난 신자'에 관하여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의 영혼에 새겨졌을 때 비로써 아브라함이 거듭났고, 새겨진 그 말씀에 의해 삶을 사는 것을 신자로서 삶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최초 지음을 받은 인류의 조상은 순결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으로 살았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시작하였으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내어 쫓기고 영원으로부터 이탈된 상태가 되었습니다.(창1:23)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 전까지 타락의 삶에 속했으나 이후에는 타락의 삶과 말씀의 삶이 함께 나타났고, 하나님의 말씀의 삶이 타락의 본성에 의한 삶에 가리워 드러나지 않기도 하는가 하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삶을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정의를 잘 못 이해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모습을 읽지 못하거나 신자로서의 삶을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사람의 순결한 상태와 타락후 인간의 상태와, 자기인식의 중요한 두가지 문제에 대해서 설명한 것을 잘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독교 강요1권15장1,2권1장3)
하나님의 사역의 주체는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창조된 만물을 보전하시고, 말씀으로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자 만물이 삶을 드러내는 에너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모든 만물의 근원을 말씀으로 보았고 말씀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요1:3~4)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안에서 외부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하는 계획에서 일점 일획도 어긋남이 없이 완전하게 실행하여 나타나게합니다. 창세기 1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고 선언하고,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올때 백부장이 나와 고백한 말에 의해서 볼때도 말씀을 사역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마8:8~9)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때 말씀으로 명하시자 모든 만물이 방에서 불려 나오듯이 나타나 제각기 있어야 할 그자리에 도열하여 질서와 조화를 드러냈고, 이렇게 드러난 만물을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작품인 만물을 관리할 존재를 이미 생각하시고 순서에 따라 지으시기를 기뻐하시며,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물속에서 먼지를 취하셔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말씀으로 불러낸 만물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삶의 형태 또한 구별됩니다.
만물들은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이 최고 목표였다면, 사람은 존재 자체 그 이상으로 독립적으로 스스로 생각하여 삶을 살고, 나아가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쁨이 더하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특징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는 것과 인식이 가능한 형태로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인식할 수 있는 최대의 한계로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이고 이 이상 더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자신안에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게 말씀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특징을 그대로 본받은 존재인가? 라는 의문으로부터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비교가 나타난 것입니다.(창3:5) 이 비교는 최초의 사람 하와를 유혹하여 인류를 범죄의 상태로 빠뜨리게한 사탄의 말이었는데, 하나님께서도 비교가 되는 다른 표현으로 "선악을 아는 일이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3:22)라고 말씀하시므로 일부분일지라고 하나님와 같은 존재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것은 부인할 수 없게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하나님과 대비된다는 것이고, 그것도 하나님의 특징을 비슷하게 옮겨 담은 존재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표현과 사탄의 말은 분명 언어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특성적인 표현으로 본다면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무소부재와 전지전능이 선악을 아는 일과 같을 수 있느냐'고 항의할 것입니다.
오히려 지나친 사변은 성경을 해석의 결정적인 오류라고 배척하게 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자의 표현은 명확하게 다릅니다. 하지만 적용되어 나타날때에는 다르지 않습니다.
사탄이 말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란, 독립적이고 모든 행위에서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서 자기 판단을 중시하는 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는 말씀은 사람의 판단에 있어서 옳고 그른것을 자기의 기준에 의해 규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지식으로 행동하되, 모든 행동의 결과는 자기 책임하에 있으며, 완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생명을 소유한 존재이여야 합니다. 이런 존재로 지음을 받았을때만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지식으로 행동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지식으로 행동하는 능동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탄의 말에 "같다"라는 말은 동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형태와 속성은 같으나 그 본질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하와는 뱀이 하나님과 같을 것이라는 의미를 동질로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느것으로부터도 지식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안에서 스스로 발생되고 그 지식이 필요에 따라 선포되실때는 말씀(요1:1)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피조물이 이해할 수 있도록 나타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존재적으로 말씀 그 이상으로, 말씀을 내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창1:3), 라고 표현함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였고, 사도 요한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표현함으로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니 말씀이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내셨다고 표현하는 것 같지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을 말씀과 동등하게 표현하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요1:1)
하나님이 말씀이면 사역의 주체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우리의 육체의 감각기관으로부터 받아들여져 영혼에 표상으로 반영되고 영혼에서는 성령(하나님의 형상)께서 그 말씀을 조명하여 동일한 의미를 가진 지식을 생성하여 기록하게됩니다.
영혼에 새겨진 생성한 말씀은 의미에서 원본과 동일하지만 같은 능력을 가진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육체에 반영하여 드러내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자체에서 직접 능력을 나타내지만 일단 사람에게 반영되어 영혼에서 생성된 말씀은 육체로 행동하게 하는 간접능력을 가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 영혼에서 생성된 사람의 지식은 능력에서 현저하게 구별됩니다.
이 믿음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성도들의 삶에 적용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예배를 같이 드리고 영적인 삶을 함께 나누기는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 말씀이 그들 생활 속에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답시고 자주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심지어 연구하며 하나님의 진리의 서고를 드나들면서 말씀과 접하지만 말씀이 나로하여금 행동하게하는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로 하여금 생각하고 사고하게 하는 나의 본질은 육체적 모양이 아니라, 내 육체 안에서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그 “나”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삶의 환경에서 얻은 경험적 지식들의 연합체였던 것이다.
경험을 통해서 내안에 들어온 지식들, 그 지식들로 말미암아 깨우친 여러 가지의 지식들이 나의 지성에 자리를 잡고 서로 간 유기적 연합체를 형성하고, 육체를 움직이는 나가 된 것입니다. 실지로 나의 본질은 나의 지성에 있는 지식들의 유기적 연산을 통해서 사고하여 어떤 지식을 육체에 반영하여 그 지식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 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백하게 나는 육체가 아니라 육체와 함께한 내안에 거하는 경험적 지식들이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예로 내 안에 경험적 지식들이 없다면 나는 사고하지도 못하고, 지식을 내지도 못하며, 세상이나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을 하는 모든 것이 지적이지 않아 감각적인 동물들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경험적인 지식들이 없다면 내가 지금 세상과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나는 세상이 존재하지만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종의 생물체 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을 통해 나의 지성에 들어와 있는 지식으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통해 활동하려는 지식을 육체에 반영하여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결국 사람이 태어나면 육체로 사는 동안 경험적 지식들을 받아들이고, 그 지식들이 점차 더 확대 성장하여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은 육체로 태어나서 사회적 환경을 통해 자라며 성장하면서 자기 안에 한 인격을 형성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데, 그 후 육체를 벗고 그 영혼의 지식체로 영원불멸의 존재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창조 목적과 사람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지난날 동안 교회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하려고 가르치는 것이 결코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지성에 새겨지도록 하는데 이미 있는 경험적 지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왜곡시켜 버리거나 아니면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것을 성경 여러 곳과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지성에는 오래전부터 경험을 통해 들어와 나를 형성하는 지식들이 있고, 지금 이 순간 나와 여러분은 이 지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만약 이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할 수 없고, 소통하지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의 말이 자기 안에 있는 지식과 일치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렵고, 판단이 안 되어, 어지러워하실 겁니다.
다른 분은 벌써 이 동영상을 꺼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벌써 껏으며, 눈이 감겨 졸리다 못해 잠에 취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경험적 지식의 연합체인 내적 존재를 터치하면 강한 거부반응으로 실증, 거부, 냉담, 공격, 혹은 무반응으로 나타납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되기를 “곧 말씀을 들었을 때 사탄이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은 것이요”(막4:15, 마 13:19, 눅 8:12) 라고 한 말씀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의 본질은 자기에 대해서 분석하거나 관심을 갖고 접근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공격적으로 돌변하고, 자기를 오픈하여 당당하게 드러내 보이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지식들이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통같은 보완태세를 갖고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며, 공격성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 무기는 로마서 1:28~31에 기록한대로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구든지 사람이 살아온 경험적 지식을 탐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탐구하려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이 철통보완으로 방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모든 비밀들은 그 본질 안에 지식들로 묶여져 있고, 그것들 가운데에는 도저히 드러내서는 안 되는 온갖 더러운 과거 삶의 내용들이 곳곳에 박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들어나면 자기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그런 일로 인하여 자기가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욱 보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됩니다.(롬1:32)
그런데 경험적 지식들로 가득찬 사람의 지성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외쳐대면 나타나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온순한 양처럼 변하여 순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주 굉장한 효과입니다.
이런 순한 양에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하는 것은 매우 좋은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놀라운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온전하고 순한 양의 옷을 입은 성도가 아주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합니다.
변화되는 것은 맞지만 선에 대하여 고도의 지능을 가진 존재가 됩니다. 교묘하게 지식을 생산하여 신앙을 왜곡시키는가 하면, 진리를 왜곡하여 자기 편리한 상황으로 바꾸고 그것을 신앙화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저도 이런 지식으로 거듭난 사람으로 살아 왔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나는 믿으니 거듭난 사람이고, 이제 내가 죽으면 예수께서 나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순진하게 믿고 편리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변한 것 같은데 실지모양은 “교회에 나가고 예배 드리고, 신앙적인 교제를 하는 것, 이것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아니 이게 무슨 말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은 계속이어 왔는데 뭔가 맞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하기를 내 안에 있는 나의 삶의 경험지식의 유기체는 그 자신을 바꾸려하거나 혹은 본질을 분석하려하면 공격성을 드러내고 방어하려고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순한 양처럼 온순한 사람이 되어 예배에도 참석하고 신앙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인다고 하는 것은 뭔 말인가?
여러분들은 들으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았나요?
실지로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정체성, 사람의 본질에 관하여 말하고, 나아가 어떻게 하는 것이 중요한가를 말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고보니 혼돈스럽게 되었습니다.
아니 저는 혼돈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잘 전개해 왔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 중에 드러난 하나의 모순을 정확하게 여러분들이 발견하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본질은 “자기 삶의 경험을 통해 들어온 지식들의 유기적 연합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연합체는 지식으로 구성되어있고, 이 본질이 갖는 가치가 무엇이냐를 말하려 한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에 자신을 드러내셨고, 이에 대한 본질이 어떤 반응을 하느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사람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개입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본성이 바꿔지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살라고 강조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내 말을 듣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셔서 “내 말을 듣고 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명령이었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이것 먹지 마, 이것 먹으면 죽어”라고 가르쳐 주셨고, 신학에서는 이를 “행위 명령”이라고 하고, 이 말씀의 의미가 간접적으로 “내 말을 들으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기대를 실망시켰습니다. 곧 사람은 하나님께서 죽는다는 그 길을 향하여 가버렸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사람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실과를 먹었으니 삶에 고난과 형벌이 따르고 너에게 주었던 안식처를 잃게 될 것이니라”(창3:11~24)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까지 말씀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의 삶에서 부딪혀온 문제를 슬기롭게 해쳐 나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사람은 안식처에서 추방을 당하고 삶의 고통 속으로 내 몰렸을지라도,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고 그 말씀대로 산다면, 사람은 타락이전의 상태로 회복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원하시는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실망하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고전3:19), 자기 꾀를 내지 말며, 자기 지혜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고전1:21)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길로 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의 결과를 얻고 나아가 원하는 인생의 삶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의 지성에 들어와 사람의 본질에 구성되고, 사람들이 이 말씀으로 생각하고 사고하여 행동하는 지식을 생성하여 육체가 행동하도록 반영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경험의 지식으로 구성된 사람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지식이 해석하는 기현상이 사람에게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본성을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경험의 지식으로 구성하는 두 개의 구별된 지식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성된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과연 있는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요한복음 8:28~29에 예수께서 생전이 말씀하신 것을 사도 요한이 듣고 기억했다가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또한 예수께서는 친히 아버지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이를 말했습니다. (요 10:38, 14:10~11, 15:9, 17:13,21,23, 골1:19, 엡1:3)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시고 아버지는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지성 안에 하나님의 아버지가 거하십니다. 그 아버지는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유기적 연합체로 예수 안에 거하시고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와 선지자들,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거하는 말씀은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말씀과 그 본질이 다릅니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사도들의 지성에 말씀을 조명하셨고, 사도들의 지성이 이를 모형으로 생성하여 가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Copy 한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비록 사람들의 지성에서 생성된 말씀이지만 성령이 조명하시면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결과를 나타냅니다. 지식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한결 같이 자기 안에 생성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였으며 모든 신앙인의 본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자기 지식으로 구성된 사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 지식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식입니다. 사도는 이를 일컬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한다(롬1:21)에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지식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어 버린다고(롬 1:23) 했습니다. 또한 이 지식은 하나님을 없다고 결론 냅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엡2:12)
이와 같이 본질이 다른 두 지식이 있으나 이 지식들을 각기 다른 편으로 나뉘어 가진 것처럼 한편은 어느 지식을 다른 편은 다른 어느 지식으로 각기 구별하여 가지지 않았습니다.
아담이후 하와의 유혹으로 타락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자기경험의 지식만 가집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지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선택된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 선지자와 제사장, 사도들 일부를 포함한 선택된 백성들은 본래 자기 경험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어느 때에 성령이 그들의 지성을 조명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갖게 되고, 그 말씀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의 표현이 로마서 7장에 바울이 언급한 두 사이에 끼인 인간의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사도는 사람을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옛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새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4:22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라고 합니다.
사도의 사상에 의하면, 옛 사람은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물려받은 정욕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유전된 죄인이고,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시작된 사람을 의미하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공히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유대인은 성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반면 이방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점들을 로마서에 잘 기록하여 오늘 우리로 신앙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지나간 날 동안의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 볼 시간입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으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 옛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말에 의하면 옛 사람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도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이는 신앙인의 전제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도가 말하는 옛 사람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로마서 6:6절에 명확하게 표현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옛 사람을 죄와 동등시 합니다.
옛 사람은 죄입니다.
죄의 사람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죽이지 않으면 자신으로부터 옛 사람의 행실을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옛 사람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사람을 죽이기 위해 자살을 한다면,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고,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 문제의 근본 부터 해결하는 방법이 로마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체널에서 선포되어지는 구원의 비밀을 로마서와 함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신앙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놀라운 기쁨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구성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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