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죄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우리의 영혼에서 생성된 모든 왜곡된 지식이고, 지식대로 행하는 것을 악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 어떻게 죄가 되는지를 알고 죄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확인한 후에야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부르시는 칭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4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간단한 구절이 아니고 이 문턱을 바르게 넘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교리들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신학을 갖게 됩니다.왜냐하면 사람의 추함과 더러움, 하나님의 선과 의를 담은 구절이고 많은 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이를 하나하나 조화를 이루는 신학을 정리하면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칭의의 교리가 모든 신학적으로 잘 정리된 “조화되는 정의”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칭의를 아는 것만으로는 진리를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 신학들에서 개혁주의 신학처럼 조화를 이룬 칭의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칭의를 말하고 구원을 말할 수 있는 그 담대함 앞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의아스러울 정도이지만 그들의 조화되지 않은 신학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것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신학으로부터 가르침을 보면 범사에 믿음을 강조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퍼즐을 쏟아서 흩어놓고 다시 그 퍼즐을 맞추지 못하거나, 마치 한조각의 퍼즐을 다른 모양의 퍼즐위에 올려놓고 이상하고 완성되지 않은 엉망인 그림을 붙여 놓고는, 본래의 모양과 다른 구멍나고 덜끼워진 퍼즐 판에 다시는 맞추지 못하도록 본드칠을 해버린 상태와 같고, 그의 손에 한조각을 들고는 아무데나 붙이고 퍼즐판을 완성시키려 하는데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들의 신학에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으로 다 맞추었다고 생각하고, 구멍나며 들어갈 조각들이 많은 퍼즐판 어디든지 맞추기만 하면 들어맞고 완성되어진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불의를 행하면서도 믿음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신학 자체가 조화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각 부분 에만 모양을 갖춘 신학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이라는 전체의 모양은 조화로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조화라는 것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그 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죄의 본질에 관하여 다시한번 정의하려고 합니다. 이 정의가 신학적으로 조화를 이룬 정의인지는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는 이미 블로그에 여러번 언급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대부분은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는 우리 영혼의 지성이 생성한 지식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영혼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성된 지식은 감성에서 지각되고 전인에 반영되어 인식한 후 인식된 지식대로 생물체가 움직이는데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행동이라 하고, 단순한 움직임을 활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지식을 인식을 했으나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지식도 있고, 동물과 같이 감각적으로 움직이는 활동도 있습니다. 전자는 전인의 인식 기관에서 행동화 되지 않은 지식, 곧 마음에 있어서 생각되어지는 지식들을 의미하고, 후자는 지식에 의해 행동하지 않고 감각으로만 움직임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데 동물들이 바로 이런 움직임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지식을 가진 동물이라 하고 동물을 감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이성이 없다(유1:10, 밷전 2:12)고 말함으로 지식의 유무로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 같이 피조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피조물이라는데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 부조화된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피조물이라는 이 조각을 반드시 있어야 할 제자리에 두지 않고, 다른 곳에 붙여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학은 이 퍼즐을 반드시 제자리에 놓고 다른 교리의 개념과 조화롭게 맞추어 진리를 도출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신학자들이나 하나님과 사람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이 피조물이라는 개념을 알고도 제자리에 끼워놓고 다른 교리들과 조화롭게 진리가 도출되도록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손에 피조물이란 조각을 들고 있기만 할 뿐 판에 끼워 넣지 않고 진리를 도출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피조물이란?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진리를 교리라는 판에 끼워놓고 정리하려는 교리의 신학에 적용되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것은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모두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들어진 것은 스스로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라는 것은 어떠한 도움도 자기 안에서 자기의 기능으로 자연스러운 작용을 말합니다. 이런 작용은 피조물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지음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능력으로 스스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에 대한 선천적이며 생득적인 지각을 주셨다’고 굳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식이 과연 교리적으로 조화로운 것인지 확실하게 신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천적이며 생득적인 지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지각이란 감각기관의 작용입니다.
영혼이든 육체에서든지 지각을 갖는 다는 것은 객체와의 접촉을 통한 관계성이 성립된 상태에서 인식할 수 있도록 판단능력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객체 애대한 정체를 판단 능력이 아닌 옳고 그름에 대한 성질을 판단하는 능력을 부여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판단능력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과 그것들을 대비하여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할 능력이 무엇으로부터 판단을 결정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판단작용에 관하여 신학자들은 아무런 답을 말하지도 못하면서 “그럴 것이다”를 “그것이다”라고 추측을 정당화해 왔던 것입니다.
경험적으로 살펴 볼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의 판단 기능은 하나님께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기준에 의해 판단하고 있지 않은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옳다고 판단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판단하고, 서로 다른 판단으로 기준이 일정하지 않으며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런 판단은 타락으로 말미암은 결과적인 것이기 때문에 본성인 양심에서 일어나는 판단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곧 사람은 타락했으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양심까지도 그 기능이 있어서는 왜곡되어 버렸으나 양심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 가면 대부분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난해하면서 결론을 얻을 수 없는 논리들은 손에 잡히는 그 무엇이 드러나지 않고 계속해서 나열만 되기 때문입니다. 뭔가? 알 듯 모를 듯 잡힌 것 같으나 빈손인 이런 논리 속에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박사가, 신학자가, 목사가 말했으니 그 말이 참말이겠지! 모르긴 해도 그런 걸 거야, 하고 넘어가기 일 수입니다. 마치 진한 안개속을 더듬은 것과 같은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정말로 답이 없는 논리입니다. 사람이 타락했다는 것 까지는 성경이 말하는 내용이니 틀림이 없지만, 타락한 사람에게 있는 양심이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은 사람은 타락했으나 양심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사람의 일부분인지, 아니면 사람의 부분이 아닌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기능이 사람에게 박혀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 결코 답을 찾지 못한 미로속에 빠져 들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제 곧 “옳고 그름에 대한 선천적이고 생득적인 지각”이라는 것이 사람의 본성의 타락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학의 부조화로 인하여 전체 신학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입니다.
Calvin 은 정확하게 말하기를 양심까지도 타락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곧 사람의 최후의 보루인 양심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림으로 인해 모든 판단이 삐뚤어져 버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적인 타락을 말하는 의미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미로를 헤매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합니다. 양심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이유와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거나 선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 먼저 양심이 무엇인지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양심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그 기준이 무엇인지 말하려는 것입니다. 양심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별도로 할 것입니다. 지금은 선천적이며 생득적인 지각에 대해서 더 살펴보고 그것들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의 신학적 교리들을 정리하는데 있어서 제자리에 맞추어진 질서와 조화로움에 어울리는 신학을 찾아가는 과정을 진리을 찾는 작업인데 이런 신학적인 연구보다는 지극히 단편적인 부조화된 지식들로 교육하고 교육을 받아오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려는 것이 이처럼 말이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의 행위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여럿보았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자기를 책망하는 소리를 들었고 이런 대부분의 소리는 곧 자기 영혼의 지성이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탄식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이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자기 인식에서 나오는 자기를 향한 심판의 소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는 영혼이라는 존재의 자기 인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조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둘은 독립적으로 각기 인격적 기능을 가지고 있고, 지.정.의를 인격적 기능입니다. 각기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영혼과 육체가 결함하여 한 사람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데 영혼은 지성의 기능을 주로 하고 육체는 감성기능을 주로 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영혼은 육체와 같이 생물체로 조직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 객체에 대한 감각하지 못하고 육체는 지식과 같은 비 생물체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지성의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성과 감성을 영혼과 육체가 주관적으로 기능을 한다면 의지는 무엇에서 작용하는가? 이 의지는 영혼의 의지기능과 육체의 의지기능이 결합되어 마음을 형성하는 소위 비 상설 기관으로서 영혼과 육체와 같이 일정한 존재 안에 자기 독립적인 기능을 하는 상설된 기관을 갖지 못하고 육체와 영혼의 두 의지가 결합하여 마음을 구성하여 완전한 한 사람으로서 전인의 대표기관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든 의식과 행동은 마음에서 나오고 감각 또한 마음으로 반응하여 한 사람의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구조적인 존재에서 영혼의 역할은 사람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영혼이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한 지식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전인에 반영함으로 한 사람의 완전한 존재로서 기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구조적인 존재가 한 사람 안에서 각기 개별적 존재의 감각을 갖는 놀라운 상호 관계의 인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마음에서 자기의 영혼의 존재와 지성적인 역할에 대한 인식을 갖고, 육체의 감각을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곧 한 사람이면서 삼위일체로서 각기 개별적인 존재를 인식하는 것처럼 전인의 의지에서는 영혼의 역할을 인식하고 육체의 역할을 별도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함으로 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전인에서 자기의 영혼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으로 인하여 나타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영혼과 육체의 소통을 단절시킴으로 사람이 육체로만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우리의 영혼은 자신의 존재를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때 영혼이 아는 지식이 곧 하나님의 작정과 유기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무섭고 두려운 진리의 지식에 이르러 매우 인정하기 어려운 지식을 아주 여러번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르면 누구나 고개를 돌리고 괘변을 듣는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이장을 읽기를 거부합니다.
저는 간절히 권합니다. (내일 이어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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