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셨고, 이방인에게는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께 대하여 자기들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편애하여 그들에게만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행위가 옳지 않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의 의중에는 죄를 기준으로 판단할 때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구별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 있어서는 분명하게 유대인과 이방인을‘하나님의 작정과 허용적 작정 곧 유기’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작정에 속한 사람은 약속의 아들을 의미하고, 사람의 정욕에 의해 낳은 아들들을 허용 작정에 속한 아들로서 가인,이스마엘, 에서로 구별됩니다.
여기에서 정욕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 더 언급을 하여 이해를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이유는 이 글을 읽는 동안 소수의 사람들이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잉여의 자식과 허용적 작정에 의한 사람들과의 구별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아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 주장은 다른 신학들에서는 들을 수 없는 주장이라든가, 아니면 개혁신앙에서 깊이 진보된 신학이라고도 하지만, 오히려 사변이라고 치부하는 것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식을 이해하는 정도의 차이는 다릅니다. 그러나 같은 부류의 지식으로서는 차이로 인한 부정을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양한 호수가 있고 호수마다 깊이가 다르듯이 사람이 가진 자기지식의 깊이가 다양할 뿐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구별한다고 할 때, 바울과 하나님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함으로 바울이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정욕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 다시한번 정확하게 설명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아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만들고 종의 아들은 다른 이방인과 함께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분명히 말한 사상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15:1~6). 그 약속은 언제 어느 시에 어떤 상황에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시기와 때는 하나님께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목표를 알지만 그 시기와 때와 상황은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는데, 그 시간이 자꾸 흘러 급기야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함 16: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셔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와 존재를 분명히 보이시기를 원하셨고,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으로 인해 자기의 부족을 이 땅에 세워 나라를 만들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성공적이라는 표현까지는 무리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해 오히려 아직 굳지 않은 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주신 것은 명하고 명확한 뜻이 있었고 그 뜻을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너를 창대케 하리니~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졌고,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우신 약속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브라함 한사람을 위해서만 이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라, 창조 세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을 따로 세우셨고, 그 사람들을 세상과 구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나라를 세우시는 것은 세상 사람과 구별하시려는 분명한 뜻이 있었고 이들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시키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뜻과 목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별하시는 시점은, 이전까지 하나님의 아들들은 정욕의 아들들과 뒤섞여 살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지만 죄인들과 구별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창세전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작정되어진 사람들을 사람들과 죄로 말미암은 정욕으로 태어난 사람들과 구별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 죄인들 세계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세계를 별도로 세우는 목적에서 주신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계시하시고 약속하시는 것은 당시 사회구조와 구별되는 어떤 독특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 비교하여 전혀 다르지 않은 평범하게 보이는 한 나라를 세울 뿐이었습니다. 독특성이나 다른 구조, 즉 오늘날 교회와 같은 조직처럼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나라를 세우도록 하셨다면 사회적 구조에서는 이스라엘은 세상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여 존재자체를 보장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시고 약속하신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이미 거짓에 물들어 있는 사고입니다.
당시는 종교를 중심으로 한 씨족을 중심 연합한 집단 부족형태의 사회였습니다(창15:2). 아브라함도 아버지 데라의 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심으로 한 부족안에서 두 개의 다른 종교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별도로 분가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자면 종교에 대해서는 아브라함도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에 의해서 다신론적인 사상을 견지하지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자기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신이라는 인식을 갖고 그 신에 의해 자기의 부족을 세워가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다른 신을 추종하거나 섬길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기의 신이 분명히 자기에게 계시하셨고 자기의 삶과 함께할 운명이라는 생각이 당시 사회에서는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만난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른 부족 사람에게 전하여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으며 이런 일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대단한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상황과 환경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가시는 사역을 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합니다.
당시에는 종교가 모든 삶의 중심이 되지만 사람이 종교를 갖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권위를 통해 주관에 의해서 자기의 부족으로 신을 끌여 들임으로 그 신을 부족의 중심이 되게 하였지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직접 말씀하시는 객관적 인식을 통해 계시하심으로 묵시적인 동의가 함께 작용하여 서로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인 이스라엘의 형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비 작정하신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그들로만 나라를 구성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었고 이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이 성취되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에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의지 사이에서 종교적인 관계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독특한 종교적 관계에 엮어진 아브라함은 일반적인 의지에서의 신의 뜻과 직접적인 신의 의지 사이에서의 사람의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질서롭고 조화로운 환경과 상황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의 선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약속이 있을지라도, 그 약속이 성취되어질 조건이 충족되어 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믿음도 자기들의 상황과 환경에 있어서 충분한 가능성이 있을 때 그 믿음이 유효하는 것이지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믿음도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을 자기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 관한 약속도 함께 공유함으로 사래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래에게 그 약속이 자기에게서 성취될 것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은 믿지만 그 약속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믿음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사래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내조자의 입장에서 반드시 성취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사래에게서 조급한 의식이 작용하게 되었고 급기야 자기의 무능력으로 인한 조급함이 믿음보다 앞서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면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 믿음이라하고 말합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능력 여부와 관계없이 성취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조급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의 능력에 놓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자기 능력의 한계뿐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래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약속은 이제 한낱 말레 그치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이미 여자로서 기능을 상실한 시기가 지난 여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해 드릴 기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을 자기들이 만들어내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정욕의 아들을 낳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해 후대에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이삭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한 가지 꾀를 낸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꾀를 내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이슬람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래는 자신에게 나타난 불가능한 여러 가지 상황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이 소용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경수는 끊어지고 이제는 더 이상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어떻게든 아들을 낳아야 하고, 그것이 하나님과 그들에게 있어서 의가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몸종 하갈을 이용해 하나님의 약속에 성취되게 하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약속도 우리의 환경과 상황에 치우쳐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지라도 그 약속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상황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항상 불가능한 상황과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을 때 능력이 있으시고, 믿음도 성공적으로 유지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는 그 순간 믿음은 사라진 상태인 것입니다.
사래는 자기의 상태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상황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흐지부지 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불경스런 상대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노력을 하여, 수단을 강구한 것이 몸종 하갈을 자기 남편에게 주어서 아들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아브라함에게나 사래에게 정욕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정욕으로 말미암은 아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도 이를 분명히 선언하기를 육체를 따라 난자와 성령을 따라 난자를 구별하였고(갈4:30), 갈라디아 4장 31절에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라 고, 로마서 9장에서는 더 자세하게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요,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내 씨라 여기심을 받느니라,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7~8)” 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의 씨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인들은 곧 정욕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있어서는 잉여의 자식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자들은 사도의 말을 믿음을 가진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구분하여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고 믿지 않은 사람을 육신의 자녀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약속의 자녀와 종의 자녀로 구별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상징일 뿐이라는 것일까요?
앞에서 율법의 의미를 말했습니다. 그것은 최초 사람의 영혼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생성하게 하는 본유 지식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타락으로 본유 지식을 상실하게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에게 말씀하셔서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본래 지식 안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찾을 수 없으나 양심이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계시로 인하여 지식 안에 감추어진 율법을 다시 주심으로 인하여 사람으로 인하여 온전하게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의 말씀에 따라 온전하게 살았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죄로부터 구원하는 메시아를 더욱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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