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롬3:3)
어거스틴은 믿음의 목표를 논할 때 우리는 가려는 곳과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과오에 대해서 가장 견고한 방비를 갖춘 길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그분이라고 한다. 즉 그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가려는 목적지가 되시며, 사람으로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목적지와 길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될 뿐이다(신국론, Augustine, City of God, Ⅺ. Ⅺⅱ(MPL 41, 318:tr. NPNF Ⅱ, 227) 라고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어거스틴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마다 어떤 지식을 이해하는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 지식을 조명하는 자기 안에 선제하는 지식이 각자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의 지식의 조명으로 인해 진리의 지식을 생성하여 인식하는가 하면, 거짓된 지식으로 조명하여 지성이 자기지식을 생성하는 거짓되고 왜곡되게 이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이런 뚜렷한 구별은 자기 안에 있는 지식을 확증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잘못된 이해와 진실된 이해를 알 수 있는데 어거스틴의 말을 이해할 때 잘못된 이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성경을 이해할 때에도 각기 다르게 이해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 영혼에 가진 지식이 참과 거짓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지식을 처음사람 가인과 아벨에게서 거울같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진리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지식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려면 지금 행동을 성경에 비추고 판단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자기의 행위와 진리에 대한 자세를 살펴 불수 있다면 쉽게 자신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사람 가인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자신을 조명하였다면 아마도 분명히 자신을 고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에 참된지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여 이해였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말로 돌아가서, 그는 믿음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말한 것이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믿음의 정의를 말하지 않고, 자기 안에 있는 믿음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이 지향하고 있는 그 목표가 다양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에게서 믿음은 아직 믿음에 의한 우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을 지라도 그 지향하는 목표로 인해 믿음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진리의 표준을 가지지 않습니다. 뚜렷하게 어떤 조직된 지식도 없습니다. 종교적인 형식도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전혀 주관적인 것으로 시작하여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는 신이라고 믿고 있는 우상이 사람에게 나타 나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의 지식과 판단에 의해 다른 사람들의 추종을 받음으로 '종교가 되어진' 것입니다. 이를 영어로 말하자면 “religion delusion by the man”"made religion"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경을 진리의 표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보신대로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이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완전히 객관성경으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믿음이 지향하는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도록 말씀하셨습니다.(요5:39)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극단 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에 뜻을 피력하는대 있어서 “하나님의 완전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전체적인 시각에서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교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이지만 이에 벗어난 교리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모든 진리의 표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하시기 때문에 “선하심”곧 질서와 조화를 표준으로 한것을 완전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완전하심에서 벗어나실 수 없으시지만 완전하신 지식이 "선하심"으로 부터 지식을 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의 선하심에 맞대어 보고 일치하는지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런 끊임없는 반복적이고 조직된 신학으로부터 진리를 찾으려는 수고가 진리를 찾는 자의 자세입니다.
성경을 진리의 표준이라고 할 때 진리를 찾는 우리의 방향이 성경이 의미하고 있는 배경과 내포하는 의미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진리의 표준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같이 무질서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지성을 가진 사람이 자기지식으로 조직하여 만든 되어진 지식들을 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환경 곧 피조 세계 이상의 객관적인 관점으로부터 완전한 표준을 가지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사람 이상의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거스틴이 말하는 믿음의 목표를 논할 때 우리는 가려는 곳과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는 주제에 관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집중된 결론에 이르기 위한 조언으로 믿음이라는 주제가 목표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한 초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에 관하여 논하였는데 그 목표가 원하는 지점에 이르지 아니한 결론을 얻었다면 그것은 믿음과 그 목표와 일치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알아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은 믿음이 우리의 지식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어떤 방향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지식에서 생성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calvin 은 ‘인간의 지성은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을 간파하거나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정의하기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바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의 영혼 안에서 육신으로 감각한 그 말씀을 조명하신 성령의 계시로 지성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지각함으로 처음 만난 하나님을 경험하고, 영혼의 이 경험이 사람의 전인에 반영하여 비로서 인식을 가진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반응 행위입니다. 인류의 조상의 첫 아들 가인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으나 그의 영혼에서 성령의 조명이 없음으로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을 조명하여 왜곡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함으로 성령의 조명에 의한 지식과 구별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로 구별된 하나님을 진리대로 알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의식적인 행위를 할지라도 그의 영혼에서 조명하는 지식에 따라 진리의 하나님과 거짓된 하나님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Calvin 이 말하는 대로 신자의 영혼에는 반드시 성령의 조명에 의해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가지고 인식하여야 합니다. 이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바 된다”라고 가장 확실한 정의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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