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 3;2)

생명있는 신앙 2013. 6. 1. 06:55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3:2)

 

유대인들에게 약속과 함께 주어진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어떤 신뢰를 목격하셨기 때문에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어떤 조건에 의해 주시게 되었는지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말씀과 율법(할례포함)을 주시고, 이방인에게 율법을 주시지 않은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불평등하며 오히려 자비가 없으며, 편애하시는 분으로 오해할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애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에게 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어떤 조건들 때문에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방인을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시지 않은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역사적인 증거이며 맥락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문자적인 표현들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사람 창조를 언급하는데 지음을 받은 사람의 두 자녀와 하나님 사이에 하나님의 편애가 드러나 보입니다. 그 편애는 사람의 행위를 기준으로 하고 지극히 비합리적이며 일방적인 것으로 판단 될 수 있도록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비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는 것이며, 아벨을 살해하는 현장에서의 하나님의 부재와 그것을 알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한 의구심등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눈을 피해 살인을 저지르는 가인을 뒤늦게 발견 하시고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시며 행위에 대해서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면 용서 해주시겠다고 인식되게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부어진 일반적인 생각들은 뒤죽박죽된 끝없는 혼돈과 무질서 상태 속에 놓인 기독교를 보여주고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비논리적이며 허구성이 강한 지어낸 fiction처럼 인식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한 가지만 질문을 던지면 기독교인들은 이내 꼬리를 내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어느 누가 이스라엘과 이방인 가운데 드러나는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편애를 선으로 답하며 그들로 하나님의 선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타락으로 말미암은 왜곡되고 거짓된 지식을 가진 거짓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없으며, 믿음을 갖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스스로 시인하면서 믿음이 없는 형제들을 향하여 마음에 가득찬 멸시를 드러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가득찬 배타성과 이방인을 향한 멸시를 만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하지만 그리스도에 관하여 진리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전하느냐고 말하지만 놀랍게도 믿음과 전혀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이 사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17장 후반 절에 보면 아볼로와 그의 제자들이 사도가 없는 에베소 교회에 와서 그리스도를 전했고 그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고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으나 수년간 아주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처럼 성령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넘쳐나는 것과 같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할례 받은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사도가 비판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복음과 이방인의 시대의 종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어두움이 덮이자 그들의 판단이 어두워졌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진리의 안목이 사라졌습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지나치게 삶에 집중하여 흩어진 마음을 추스릴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마음을 정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할 수 없는 로마의 식민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판단이 흐려지게 되자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상태가 아주 잘 보여주고 있었는데 자기를 만난 하나님을 자기지식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율법도 할례도 자기의 지식으로 판단하자 비뚤어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자기 앞에 나타난 하나님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거절당하고 그 은총이 이방인에게로 옮겨오는 하나님의 계획이 바뀌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라는 종말론적인 예언을 남겼습니다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고 그 결과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구원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나 머지않은 날에 유대인의 구원이 다시 있을 것입니다. 대대적인 구원이 있을 것이고, 그 구원의 막을 내릴 최후의 종말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방인의 구원의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날들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 구원의 날이 끝나면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비극의 날들이 있을 것이고, 그날에 이스라엘은 구원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까마득히 잊어버린 구원을 노예로 전리품으로 끌려간 페르샤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무너진 성을 재건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읽고 묵상하며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그날처럼 다시금 이스라엘의 회개과 큰 기쁨이 눈앞에 이르렀고, 이제 그 마지막 때가 도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이나 이웃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는 비극적인 날들이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만 우리의 형제들은 완강하게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오히려 우리를 심하게 핍박할 것이며 그 핍박으로 인해 어떤이는 부모와 자식이, 형제들끼리, 사랑하는 아내와 해어지고 찢어지며 강제로 유리 당하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고 슬퍼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유대의 구성원으로부터 출교하여 모든 혜택을 제한하는 것처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날은 종말을 향하고 있고, 유대인의 날은 밝은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서 이날들을 미리 준비하며 서로 사랑하기를 내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여, 더욱 끈끈한 믿음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형제들과 사랑하는 이웃과 그리고 그리스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복음로 하나가 되어 다가올 구원의 문이 닫히는 그날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지금 준비해야 합니다. 무섭고 두려운 날은 전쟁과 총칼의 위협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은 날들입니다. 그날에는 교회의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진리는 사라지고 세속화된 지식이 판을 치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성경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철저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구별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외면한 것을 말하고, 하나님으로받은 율법을 지키며 행하며 살면서 그 율법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전한답시고 지나친 편견과 아집으로 자기의 생각을 주입시키려는 복음의 열정이 아닌 자기 열정을 드러내는 보게 됩니다하나님께서는 이런 방편을 통해 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실지로 자기가 전하는 그 복음은 자기의 영혼에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가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인식하는 자기지식의 복음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고 그들의 육체에 유대인의 증거가 있지만 실지로 그들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전혀 없는 자기자신뿐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

   

오늘 저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의 학자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찾아 방해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그 구원을 말하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게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형제들의 핍박과 아픔의 날이 속히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로 옮겨가기를 강력히 원합니다. 그들이 속히 구원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날이 오기를 원합니다. 이런 두 마음이 내속에 활동하는 것은 하나는 구원을 원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 형제들이 더 구원을 받도록 기간이 길어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일이 무엇인가요? 속히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은 형제들이 복음의 깊이를 더욱 많이 알게 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그들의 몸에는 율법에 따라 순종하는 증거가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의 구성원에 속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가족인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시각이 바뀐 사도의 눈으로 볼 때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스스로 생각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아이러니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이스라엘에게만 사랑을 베푸시는 성경의 주장에 관한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크리스쳔의 입장에서 대변할 어떤 이유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일방적인 선포로 무마하여 왔습니다. 물론 사도 역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유를 달고 변명하며, 자기 생각으로 불평등하다고 인식되는 하나님의 자비 없음에 대한 주장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항변하는 것을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이런 설명에는 뚜렷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였고 이방인이나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복음의 조명에 의한 지식에서 비롯된 것을 분명히 언급하였습니다(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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