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롬3:1)
사도가 오늘 시대에 태어났고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사람이라면 “그런즉 그리스도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라고 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지금 교회가 어디에서부터 개혁되어져야 하는지 대략은 짐작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앙의 유산은 참으로 놀랍고 가치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그 진리의 표준에 서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부단이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지향하여 왔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신앙고백의 유산을 물려받고 선배 신앙인들의 유산에 충실함 삶을 발견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산업화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휩쓸어 온 오늘의 세계 안에서는 십자가 아래 높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의 설교의 담장 수준을 넘을 수 없는 20세기 초까지의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설교보다 더 좋고 휼륭한 강의와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즐거움과 지식을 무한정 제공하는 담장너머의 세상이 훤히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성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넘어 저 세상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으며, 아직까지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빠져 자신의 정체를 돌아볼 순간이 없는 숨막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할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황소가 앞에서 끌고 쟁기를 잡고 소를 모는 농부는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혼자 자신을 생각하며 내가 누군가 고민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말씀에 젖은 마음으로 고민 할 수 있었고, 20리 30리를 동무도 없이 혼자 길을 걸으면서 나와 세상에 관하여 고민하며 생각에 빠진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굳이 교회의 강단아래 나아가 무릎을 꿇지 않아도 세상에서 홀로 일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며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신을 향한 그리운 마음이 하나님을 찾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생각하며 고민할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시간에 쫓기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사는 사람들은 25시간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할 일이 많을 뿐만 아니라 보아야할 정보도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자기 너머에는 목사의 설교가 세상을 소개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는데 이제는 저세상이 손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높은 지식수준으로 사람들의 어두움을 밝혀주는 목사의 설교가 아니어도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지식의 정보는 널려있고, 7inch 모니터 앞에서 손가락만 까닭하고 키보드만 누르면 무수히 많은 세계의 정보가 홍수처럼 쏳아져 나와 그 정보를 소화하기에도 엄청난 량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작 우리의 영혼은 심각하게 메말라 있으며, 우리가 알고자 하는 그 무엇인가를 영혼이 호소하고 있는데 그것을 느끼거나 감각하지 못하며, 뭔가 부족한 어두움의 느낌이 뒤통수에 달려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두움의 주머니입니다.
터트려 지고 우리 뒤통수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고개를 흔들어 보지만 결코 우리 스스로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무거운 것도 아니고 목을 아프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세찬 바람에 내밀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연기 같은 것인데 항상 달려 있습니다.
누워있어도, 앉아 있어도, 걸어가도, 사람들하고 대화를 해도 언제나 뒤에 달려 있습니다.
어렸을 때 경험이 생각납니다.
10리 훨씬 넘은 먼 길을 무거운 책가방을 등에 매고 학교를 오갈 때 입니다. 아침에 학교에 수업을 듣고 가을의 따스한 기운을 받으며 서산에 느윗느윗 넘어가는 태양을 정명으로 받으며 친구도 없이 혼자 산길을 지나고 들길을 걸으며 벼이삭을 훝으며 걸어가고 있을때 였습니다. 그 때에는 한없이 생각을 하고 꿈을 키우며 산 너머 세상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기대를 가지고 인생을 생각했었습니다. 그 어느 날에는 하나님에 관해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들길을 걸을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도 없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없었으나 어떻게 들었는지 나도 모르는데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체 집으로 돌아가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런 날들에는 어두움의 풍선이 없었고 뒤통수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감나무에 감 달리듯 열려 있었습니다. 이제 알고 보니 지금 내 뒤통수에 달여 있는 구름같은 어두운 풍선은 어두움의 주머니가 아니라 텅비어 있는 생각의 주머니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눈으로 보는 세상을 살지만 생각으로 살지 않습니다.
눈이 하는 일이 너무 많아 생각이 해야 할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시간을 내고 휴식을 취하면서 어두운 구름 풍선에 생각을 채우는 일들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정보가 넘치게 쏟아지는 오늘과 전혀 다른 2000년 전에 사도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자기의 육체에 할례를 행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법률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참 유대인이 누구인지 아느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넘어 세상에 하나님과 줄을 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에게 할례를 행하라 했고 율법을 지키라 했습니다. 자기들의 몸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표증이 있고, 자기들에게 주어진 율법을 읽고 수업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율법은 자기들만의 것이고 이방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가 한 말은 몸에 징표 가진 것이 중요하지 않고 율법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을 고백하는 정통적인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과 교회에 출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와 교제를 하며 교회를 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 삶은 사도 자신이 보여준 영혼의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이 변화는 복음이 영혼의 지성에 심기워지는 것으로 부터입니다. 그 심겨진 복음이 조명하는 지식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대인과 이방인(롬3:1~2) (0) | 2013.06.04 |
---|---|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 3;2) (0) | 2013.06.01 |
너를 정죄하지 않겠느냐?(롬2:27) (0) | 2013.05.27 |
율법과 할례(롬2:25~26) (0) | 2013.05.26 |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롬2:24) (0) | 2013.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