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유대인과 이방인(롬3:1~2)

생명있는 신앙 2013. 6. 4. 02:12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3:1)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3:2)

 

그러므로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것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실 때에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 사람들에게 처음 주었던 지식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모습이 안타깝고 불쌍해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본래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있었던 지식인데 범죄 함으로 잃어버리게 되었고, 피조물인 사람이 이 지식을 잃어버림으로 어두움에 처하여 왜곡된 자기 지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신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처음 창조 시에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주셨던 것인데 사람이 범죄 함으로 잃어버리게 되자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주신 것입니다.

앞에서 일관적으로 말한바와 같이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는 하나님의 작정과 유기가 적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작정은 창조하실 때 반드시 되어 지도록 정하신 것이나, 유기는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선택에 의해 허용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를 허용적 작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담을 지으실 때 아담 안에 속한 사람으로 작정하여 있게 하신 사람들이라면, 이방인은 아담의 선택의 결과에 따라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아담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금과를 범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방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한 작정이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이 교리에 대해서 왜곡된 해석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들을 이스라엘과 동등한 존재로 여길지라도 하나님께서 가진 본래 을 수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가인과 같이 하나님의 작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범한 죄의 열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이 죄를 범할 것을 미리 아셨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태어나도록 허락과 허용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잉여의 자식들이고 하나님의 작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고 정욕을 일으킨 결과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 비하여 이방인인 우리는 참으로 비참하기 이를 대없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존재라는 엄청난 축복을 가진 존재가 되었으나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작정에 속하는 존재와 결코 같아 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사도가 죄라는 시각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비교하여 볼 때 아무런 차이가 없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본래는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만,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죄인이 되었고 죄인의 상태에서 이방인들을 낳았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전혀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만 죄인들 가운데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을 뿐 사람의 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의해 존재한 사람들일지라도 이방인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고 다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창세전 계획하심이 지으심으로부터 완성하시기 까지 이스라엘에 속한 것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맛볼 수 있는 엄청난 축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으나, 나타난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심으로 이삭을 주셨고, 이상으로 말미암아 바다 모래와 같은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에서와 야곱이 주셨는데 이들은 리브가의 태에서 이미 구별되어 태어났으니 야곱은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 사람이고 에서는 유기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은 사람의 정욕 속에 하나님의 작정이 감추어져 있었고, 하나의 정욕의 행위로 작정과 유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아들인 이스마엘을 낳도록 허락하셨으나 그 아들은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고 약속하신 아들은 이삭이었습니다. 만약 이삭이 창조하실 때 아담의 씨에서 태어나도록 작정된 아들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이 사람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모든 성경으로부터 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는 몸종으로부터 낳은 종의 아들이고, 다른 아들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반드시 낳아야 하는 약속의 아들입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차이점이 숨겨져 있고, 보다 깊은 의미로는 사람의 능력인 죄로 말미암은 정욕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구별이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죄의 관점이 모든 구별을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3장 하반 절에 가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유기를 무시한 바울의 생각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분하여 말하는 것 그것이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작정과 유기를 말하고, 그 관점에서 이들이 서로 구별되나 죄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작정과 유기가 조명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안에는 실지로 하나님의 작정과 관계없는 많은 허용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유기자들이 이스라엘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삭이 리브가로부터 한 태에서 작정의 아들인 야곱과 유기의 아들인 에서를 낳습니다. 사람은 한태에서 두 아들을 낳았으나 이들은 태안에서 이미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안에 있는 구별된 두 부류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으로는 이 구별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작정의 아들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 안에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작정과 유기의 구별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이 사도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에 큰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 외에는 이방인과의 구별에서 더 나은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