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독교가 얼마나 참된 기독교에서 멀리 떠나가 버렸는지 조금씩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개혁교회도 이름만 가진 교회가 너무 많고 자기 스스로 세속주의 교회와 혼합되지 않고 구별된 교회라고 주장하지만 실지로 세속주의 교회보다 더 교묘한 세속주의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구약성도들에게 율법이 있듯이 교리가 있고. 율법학자들이 만들어낸 토라가 있고, 할례가 있듯이 세례가 있고, 거룩한 제사 있듯이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작 그들이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나 세례와 경배와 찬양이 있으며 제사에 가장 중요한 희생도 있는데 놀라운 것은 사람이 드리는 그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것을 명백하게 보여 주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에서 거룩한 제사와 희생을 드리고 있었고 기드론 골짜기에는 희생 제물들의 피로 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수십만의 짐승이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어갔고 하나님을 향하여 높이 들려지는 찬양도 있었으며, 거룩하고 엄숙한 경배가 있으며, 대제사장과 율법사들, 바리새인들의 가르치는 교육도 있었는데 진작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고, 광야와 들판, 그리고 병들어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셨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있는 십자가 아래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예루살렘의 예배와 전혀 다름이 없었습니다.
예배드리는 사람도 있고, 거룩한 찬양도 있으며,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나누는 교제도 있으며, 아낌없는 봉사와 헌신이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인 섬김이 있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없고, 사람의 지식과 철학만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고 닮은 형태를 가지고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것을 다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조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치 가인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조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기 지식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처럼,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고 읽으며 묵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해석하는 책을 읽고 성경을 이해하고 있으나, 실지로 그들의 영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조명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는대로 이해하여 신학은 조화롭지 못하고 교리는 필요한 곳에만 적용되는 전체적으로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어그러진 모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지음을 받은 아담의 영혼에 주어졌던 본유지식이 조명하였을 때는 육체가 감각을 시작하여 감각된 표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였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본유지식을 주시지 않았다면 영혼은 지식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지식을 생성하지 못한 존재인 사람은 감각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객체에 대한 반응으로는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따라 반응할 뿐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객체에 대하여 감각하면 지식을 갖고 인식하는 것이 사람인데 이때 영혼에 있는 본유지식이 객체에 대한 표상을 조명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객체에 대하여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람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본유지식 외에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지각된 지식이 없었습니다. 영혼이 아직 지식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인식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음을 받은 사람이 영혼은 지식을 갖고 인식하며 육체를 아직 깨어나지 않은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모든 인식은 사람이기 때문에 전인에서 하고 영혼은 지식을 생성하고 감성으로 지각하여 지성에 새겨 가지는 일이 영혼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생득적 관념이라는 주장은 신학적 교리에 있어서 전혀 조화롭지 못한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만들어진 주장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지속해오는 것은 영혼이 자기를 깨닿고 몸부림으로 육체가 죄를 범하는 것을 일깨워 양심의 소리를 발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가 행하는 악행을 죄라고 말하는 그 지식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진리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람이 지식을 생성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은 하나입니다.
그들은 결합하여 전인에서 인식을 합니다.
그래서 결합된 상태에서는 영혼이 별도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죽음으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었을 때 영혼이 인식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은 영혼이 스스로 판단하는 다른 상황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육체와 영혼이 소통할 수 있는 개별적인 의지의 작용인대 양심은 바로 이런 작용을 통해 육체로 하여금 영혼의 뜻을 전달하고 이것이 사람에게는 양심의 작용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영혼의 외침인 양심은 어떻게 판단하는 지식을 가졌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결합되었을 때 생득적으로 지식을 받아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지음 받은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확실해집니다. 그런데 양심이 영혼의 소리라고 하고 영혼은 그 외침의 근거인 지식을 어떻게 가졌고 그 지식을 통해 육체가 행한 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었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혼이 처음 지식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최초 말씀을 주셨고 그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짐으로 비로서 사람이 눈을 열어 감각을 가질 수 있는 상태 즉 지적 열림의 상태가 되었고, 객체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감각된 표상을 영혼의 지성에 반영하고 반영된 표상에 대하여 하나님 형상이 조명됨으로 자기지식을 생성하고 이렇게 생성한 지식을 사람은 지각을 통해 전인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곧 영혼은 육체의 감각된 표상을 갖지 아니하고는 결코 스스로 지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지식을 담는 그릇인데 이 그릇에 진리의 지식을 담기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이 필연적이고, 육체가 객체를 감각하여 지성에 표상을 반영할 때만 지식을 생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죽어 영혼과 분리된 상태에서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많은 다른 교리들과의 조화를 위해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동의하기 위해서는 이미 가지고 있거나 교회의 교사들을 통해서 배워온 자기 안에 있는 부조화된 신학을 정리해야만 가능하고 그 지식을 가진 상태에서는 아무리 이 지식을 받아들이려 해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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