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을 사로잡은 욕정(육신의 소욕)은 영혼을 휘둘러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합니다.
다윗은 수하에게 목욕하고 있는 저 여인이 누구인지 가만히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전령을 보내 그 여인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이 여인의 운명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잘 된 것입니까?
아니면 불행을 향하여 이끌려가고 있습니까?
힘을 이용해 무능하고 연약한 사람을 자기의 욕정을 채우는데 이용한 다윗은 비난 받아도 마땅한 일을 자신과 자기의 수하만 알도록 한 다음 여인을 농락하고 욕정을 채우는 도구가 되게 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본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장면을 주관적으로 적용하여 다윗을 판단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만약 성 도덕이 없는 자유분방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면 다윗의 행위는 아무런 죄가 될 수 없고, 정직성을 논할 대상도 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또한 그것이 그들의 양심에 거리낌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로 인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엄격한 도덕과 상하 윤리가 분명하게 지배 받는 삶속에 잇는 사람이라면 다윗의 행위는 천인 공로할 범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기의 입장에 맞게 이해하거나 적용하여 해석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라는 사람은 일반인의 주관적 상황들과는 전혀 적용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사람일 뿐만 아니라 한나라의 왕으로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실지로 그가 범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아주 쉽게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처리했습니다. 그와 같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다윗에게 있어서 도덕은 그의 영혼에서 조명하시는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온전한 도덕을 적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영혼에서 다윗을 이끌어온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는 욕정에 지배당하는 다윗의 영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한번 보는 것으로 욕정은 영혼을 파고들어 왕좌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욕정은 성령의 조명을 가로막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영혼을 사용하여 욕정을 성취하는 지식을 생성하여 의지에 줄기차게 반영하였습니다. 영혼이 욕정에 사로잡히게 되자 어떻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인을 품에 앉고 즐길까 하는 계획을 가진 것입니다. 이런 계획은 결코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신 것이 아니었고 옛 사람의 지식이 그동안 자기자리를 성령 빼앗긴 것을 되찾아 지성으로 왜곡된 자기지식을 생성하게 한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성령의 조명은 감추어지고 완전히 타락한 본성이 되었습니다.
교묘하고 전략적이며, 야비한 방법으로 모든 백성들을 속이고 자기의 정욕을 채우는데 여인을 이용했습니다.
왕에게 불려온 여인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떨었으며, 어리둥절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며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죽은 자처럼 다윗 앞에 조아리고 고개를 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불려왔는지 영문도 모르고 조아려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다윗은, 목욕하고 있는 여인을 상상하며 그를 삼키려는 야수와 같이 욕정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무슨 말로 여인을 유혹하였을까요?
절대 권력자 왕 앞에 파리 목숨처럼 놓여진 자기 운명을 저주하며 만 백성의 왕이 아니라 흉악한 야수에게 짓밟히고 있는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어떤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했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반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순순히 응대할 수도 없습니다.
이 여인에게 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전혀 개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동생 아벨을 들러 불러내 죽이는 가인의 완악한 계획을 말리지 않으시고 그가 내리치는 몽둥이에 온몸이 쪼개어지고 땅에 피를 흘리며 생명이 끊어져 가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역사를 행하시지 않으셨으며, 아벨을 구하지 않으신 것처럼, 이 여인의 위기에서 구하시지 않으셨고, 다윗의 악행을 제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제지를 받지 않고 자기의 욕구를 채웠습니다.
어떤 말로 유혹하여 여인을 꼬드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윗은 만족했고, 여인은 고개를 떨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기의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이 왜 다윗을 만났는지, 아니면, 왕을 만났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가능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일이 다윗의 신복들만 알았지만, 왕의 권위로 그들의 입을 단속하여 죄는 권력의 그늘 속에서 화를 부르고 자라고 있었습니다.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잠언9:17)”라고 성경이 말한바와 같이 다윗의 욕구는 수많은 아내들이 있었으나 옥상 아래에 살고 있는 남의 여인에게로 더 이끌렸고 그리웠습니다.
옛 사람의 지식은 이처럼 질서와 조화를 조금도 갖지 않은 무질서하고 도덕이 없는 왜곡된 지식입니다. 타락한 사람의 영혼은 오직 자기의 만족과 성공과 승리만을 위해 자기를 위해 생성하고 그것을 위해 매진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심지어 신앙까지도 승리와 성공을 위해 이용하게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은 자기지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거듭나게 하는 회개까지도 자기지식으로 조직화하여 마치 그런 것 처럼 성경을 인용하여 꾸며낸 육적인 신앙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냥하고 있습니다. 또한 타락한 사람들은 그런 신앙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한 신앙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며 그런 신앙에 있는 것을 행복해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다른 교회들은 멸시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배타적인 신앙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기독교 옷을 입은 비 기독교인들인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는 범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보기에 아주 정통적인 신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영혼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욕정을 채우고 자기의 일을 정당화하게 하기 위해 우리야를 적의 손에 죽이고는 그의 아내를 완전히 자기의 아내로 삼아버리는 왕만의 합법적인 행위로 모든 국민들을 속이고 정의로운 사람처럼 위장한 그의 범죄가 얼마나 치를 떨게 하고 있습니까?
이런 일들은 오늘날들도 그대로 행하여지고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니 우리가 칭찬하고 있는 선하게 보이는 거짓된 사람의 행위가 위선과 흉악한 욕정과 탐욕 속에서 일어난 다윗의 범죄와 같은 행위였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앉고 일어서심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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