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51

주의 의를 높이 노래 하리이다(시51:14)

생명있는 신앙 2013. 8. 18. 07:02

 

주의 의를 높이 노래 하리이다(51:14)

 

오늘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아벨의 제사와 같은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날의 제사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드릴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과 같은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를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 세계는 온통 짐승들의 사육장이 되고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해 짐승의 피 냄새가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그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충분히 대속이 될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셨으므로 완전히 끝나고 이제는 대신 마음을 찢는 통회의 고백과 하나님의 말씀이 임재하는 하나님과 성도간의 교제의 예배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공동의 고백과 자기의 영혼을 위해 자기를 드리는 나아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인식하는 임재와 고백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재하게 하는 것이 교회를 이끌고 가는 사역자의 의무라면,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 임하십니다. 만약 사역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씀을 말한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에 오시지 않았고, 성도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예배에 참여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세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역자들은 성도들에게 끼칠 은혜의 말씀이 자기에게 주어졌는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진리에 대한 확고한 확신으로부터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교회에 사역자는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없고, 성도는 있으나 은혜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세대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가까웠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믿음이 이제 어두운 석양을 넘은지 오래되어 완전히 한 밤중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11:25).

주의 의가 무엇입니까?

누가 주께 의를 말할 수 있습니까?

주는 의롭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주를 판단함이 되는 것입니다.

주는 판단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고, 친히 판단을 하실 수 있는 자신마저도 그 판단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8:15~16). 여기에서 판단은 의를 찾기 위한 의식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떤 기준에 적합한지 비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판단은 오직 선의 여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선에 대비하여 판단할 수 없고, 선하신 하나님을 선하다고 우리의 의식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에 관한 지식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선하다 할 때 그 선은 타락하고 거짓되었으며 왜곡된 지식의 선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심겨진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선을 말할 수 없고, 선의 여부를 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뿐이십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가 우리의 영혼에 지각 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행위를 말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선으로부터의 행위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으로서도 스스로 자신을 선에 기준하시고 행하시는 자기의 억제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신은 어떤 논리나 규정에 가두어지실 수 없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선에 가두어 행하시는 것이 곧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죄로부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보내시는 그리스도의 오심, 단독으로 충분히 사역하시고 일하실수 있으시지만 스스로 자신을 진리에 묶어 진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일을 혼자 하셔도 의에 부족함이 전혀 없으시지만 반드시 아들을 보내시고 친히 낮아지셔야 하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선으로부터의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이 다가와서 자기에게 선한 선생이여라고 부를 때 이를 즉시 반박하여 수정하여 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분이시니라(19:16, 18:18, , 10:17)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선하신 하나님이시면서 그 선에 대한 판단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겨두신 것이기 때문입니다.(10:17 참조)

다윗은 자기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라고 말했습니다.

실지로 다윗의 행한 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다윗의 옛 사람 속에 여전히 지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시시때때로 그것을 생각하여 지각할 수 있고 그 행위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행위를 혐오하고, 증오하며, 그 죄로 인하여 스스로 자신이 꺾어지고 자신을 억제하는 것은 죄에 대하여 의로부터의 대항입니다. 이런 의식은 반드시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악한 사람은 그 죄의 행위를 즐거워 할 것이지만 후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스스로 잘못된 행위라고 판단할 수 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있는 양심의 작용에 의해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듭난 지성에서의 의식은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든 죄로 인한 자기의 죽음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죄는 자기에게서 떠나거나 잊혀지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한 몸이고 자기지체입니다. 그래서 그 죄들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그 죄를 용서 받는 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얼굴을 돌려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참조1) 그것은 거듭나지 않은 지성의 모든 삶으로부터 얼굴을 돌리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에게 거듭나지 않은 지성의 삶 뿐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거듭난 지성으로서의 지식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얼굴을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주의 의를 높이 노래 하리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말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지성이 거듭난 지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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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1)

우리는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합니다. 원죄를 일컬어 죽음에 이르는 죄라고 하고 자범죄를 행위의 죄라고 합니다. 곧 태어나면서 물려받은 죄를 원죄라고 하고, 살면서 행한 죄라고 판단된 행위를 자범죄라고 합니다. 우리의 의식에는 자범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일부 육신적 기독교에 속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자범죄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선으로부터 출발하여 선에서 일탈한 행위를 죄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원죄로 태어난 것은 창조시 지음을 받은 상태에서 심각한 죄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사람이 숨을 쉬고 존재함으로부터 행한 모든 삶이 선으로 인정받을 만한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살게하고 행동하게 하는 모든 영혼의 지성에서 내보내지는 지식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행위에서 죄를 구별하는 판단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그 행위조차도 하나님의 선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말했고, 예수 께서는 너희는 어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일을 하는 도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사람을 거짓의 아들이라 하신것은 참으로 진리였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기독교안에는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지 않은 모호한 오류가 기독교 안에 팽배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