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범죄자의 신분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느끼는 평화를 마음에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죄로 인한 두려움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영혼은 하나님으로 즐거워하고 깊고 넓은 평화의 정원에서 하나님의 안위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나단이 말한바 자기의 죄로 인한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슬퍼하거나 두려워하는 공포스런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그의 영혼의 감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지각에 사로잡혀 평화로운 하나님의 정원에서 하나님의 빛을 받으며 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혼의 쉼,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에 시달린 영혼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으며 참된 자유에 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심판과 죄로 말미암은 채찍이 자기를 위협하는 두려움이 두르고 있으나 영혼은 하나님으로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평온, 위로, 자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오르십니다.
육체에는 우리의 죄를 지우고 가시는 고통 속에 있으며, 아픔과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주님의 영혼에서는 육체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크고 놀라운 힘이 육체의 아픔을 충분히 견디게 했습니다. 감정이 없는 짐승 같은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님의 등에 채찍을 내리치며 일어나라 소리를 치고, 인정사정 없이 휘두르는 채찍은 예수님의 몸을 찢어내는 아픔을 주지만 주님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에 의해 이 모든 일들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시고 이 채찍으로 인하여 얻은 결과의 풍성함을 아시기 때문에 이기고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있을 죽음의 고통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기쁨도 알고 계십니다.
이후에 일어날 교회의 풍성함도 알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가운데 정욕으로 책임을 지지도 못한 이방인들을 낳아 지옥으로 보내는 그 무지의 행위를 반복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무절제한 정욕이 낳은 슬픈 인생을 가지고 태어난 죄의 사람들인 이방인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화목제물이 되셨으니, 정욕으로 태어난 소망없는 이방인들의 죄를 자기에게 지우고 육체로 멸하였으니 그 고통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들어 죽고 사고로 죽고 고통으로 죽을 때 우리의 죄를 우리가 지고가지만,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원죄가 없이 이땅에 보냄을 받으신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범죄의 고통은 우리가 당하는 고동에 결코 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있는 이 고통의 원인보다 더 큰 보상을 얻게 되시는 결과를 아셨습니다.
자기의 영혼을 받으시고 결국은 만물을 자기의 발아래 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도 아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물론 세계를 얻는 명예와 자기에게 주어진 영광을 위하여 고통을 참으시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께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인식하는것이 더 우선이었기 때문에 그 어마어마한 고통을 충분히 견디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 속에서 평정을 유지하게 하는 담대함은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정원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온을 느끼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피조물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자연적인 지적인 감각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왜곡된 지식은 언제든지 진리를 거스려 자연적이며 스스로 뭔가 해내는 탁월하고, 우수하다는 인간성에서 우수성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스스로 지식을 낼 수 없으며 자연적으로 판단을 하거나 객체에 대한 지식을 가지거나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모든 객체에 대하여 지식을 가지려면 그것을 조명해 주는 선재하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을 하나님이라 할 수 있는 지식을 자기스스로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선에 적합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고, 그 내용은 질서로움과 조화로움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이 원리에 적합하게 존재 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은 여기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선하시고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존재에서도 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기를 향하여 “선한 선생이여” 라고 부르고, 질문하며 다가오는 사람을 향하여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이가 없느니라(마10:18)”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조명하심으로 지성이 그 말씀에 대한 자기지식을 생성합니다. 그 지식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여 생성한 지식임으로 선합니다. 선은 만물에 질서와 조화인데 이것이 지식임으로 사람의 영혼에 질서와 조화를 조명하여 사람으로 평온하고 안정을 유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안식과 평안은 하나님의 선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위적으로나 사람의 감정이 선을 내는 것은 참된 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자기지식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이 선을 누릴 수 있고, 그 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조명하심으로 지성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여 가진 사람이 아니고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을 누릴 수 없습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은 선지자의 말이 아니었고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은 욕구에 사로잡혔던 영혼에 하나님 말씀의 지식이 조명하게 되자 이전에 알았던 하나님의 지식들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지식으로 자기를 보았으며, 비로서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만약 다윗의 영혼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다면 다윗은 어떻게 반응 했겠습니까? 보나마나 가인과같이 변명하고 사울과 같이 핑계를 들이대며 아합과 같이 선지자를 죽이듯이 자기의 죄를 덮으려고 자기의 권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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