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롬3:22) 2,

생명있는 신앙 2013. 11. 24. 07:36
사도가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것이 지식인데 영혼이 완전하고 깨끗하여 하나님의 선에 합당한 지식을 가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생성하지도 못함으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완전히 타락함으로 영혼의 구석구석에서 전인에까지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으로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의를 행할 수도 없고 진리대로 살 수도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다고 말 할 때 믿음은 선한 행위입니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의를 행할 수도 없고 진리대로 살수도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에 이르는 선한 행위인 믿음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은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이 나온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말하자면 믿음이 선한 행위라면 믿음을 드러내기 위한 지식이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선재해 있어서 믿음을 드러낼 수 있도록 지식을 내고 영혼의 감성으로 지각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낼 수 있는 지식이 없는 사람이 선한 행위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관한 모순을 먼저 말하기 위해 오늘날 교회에서 믿음이 있다고 하거나, 믿는 사람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인과 아브라함을 조명하여 스스로 자신이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성찰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주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가인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살펴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가 드리는 제사,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인식, 아벨을 죽임, 하나님을 떠남, 이런 태마를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어떤것이 참된 믿음인지 우리로 충분히 깨닫게 합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으로부터도 믿음의 삶이 무엇이 명확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교훈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가인을 살펴 볼 때,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담과 하와에 의해서 교육되어졌을 것입니다. 교육을 받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는 지식이 그의 영혼에서 생겨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 행위를 해야 하는 필연적 상황이 왔을 때, 그가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동생 아벨과 같이 제사를 드렸다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하나님께서 도무지 받으실 수 없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죄사하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증거를 기록한 기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히11:4)

우리는 가인의 제사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을 조명하여 의미를 파악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제사이든지 가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있어서 선하지 않은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드러나는 제사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행위를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영혼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이미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의무적인 행위로 제사를 드렸거나 아버지 아담과 하와가 드린 제사를 보고 그 흉내를 냈을 것입니다. 반면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원하시는 제사의 의미를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여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의 조명으로 볼수 있는 것은, 선에 합당한 사람과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여 주는 것입니다.

왜 이들에게 이런 구별된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그들에게 변화가 온 것입니다. 그것은 즉시 영혼의 어두움이었고, 이 어두움은 육체의 사람으로 감각을 갖고 모든 객체와 사물들을 보거나 듣는 등 오감으로 감각되어진 것을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지식을 생성하여 주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형상 안에 있었던 본유지식이 없으므로 감각된 표상에 대한 지식을 조명해주는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범죄 할 때, 즉시 무지 곧, 모르는 것이 지각되어졌고, 모르는 것 때문에 감각한 객체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함으로 인해 억지로 자기지식의 조명으로 왜곡된 지식을 갖게 되는것입니다. 이 지식이 결국은 왜곡된 행위를 하게 하고 이 행위가 죄로 말미암은 행위가 되므로 죄가 되는 모든 행위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국 가인의 영혼에는 감각한 하나님에 대한 조명을 받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런 지식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제사의 의미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제멋대로 드리는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더군다나 가인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하나님은 그의 육체에 감각되어졌고, 음성이 그의 귀에 들려져서 영혼의 지성에 들어갔으나, 들은 말씀과 만난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알 수 있는 지식이 가인의 영혼에 없기 때문에 감각들을 조명하여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지식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 이방인들의 모습을 거울처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까지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도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가인과 같이 우리 마음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온갖 악한 말들을 쏟아 놓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어리석고 고매한 종교인이라고 답답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온갖 불손한 태도로 악한 말들을 쏟아내는 원수였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가인을 통하여 우리가 얻는 지식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데라의 아들로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근심과 문제로 희망이 없는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본토 친적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

이때 아브라함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으로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어진 자식이 아버지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을 가인과 아브라함을 비교한다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만나셔서 죄를 경고하시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인이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가인의 마음은 미움과 분노와 질투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람은 자기 인생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물론 두 사람의 문제점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상태는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각기 다른 두 상황에 비유하여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데 실지로 문제의 내용과 하나님의 만남으로부터는 어떤 의미도 찾으면 안됩니다. 다시말하자면 가인은 분노하는 마음이 가득차 있었고, 아브람은 인생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접근하는 방법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진리대로 보지 못하게 가리는 것입니다.

가인의 하나님 만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 만남은 하나님을 만난다는 점에 있어서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단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것을 지각 할 수 있도록 자기지식을 생성하는 영혼의 지성에서의 작용이 문제인 것입니다.

먼저는 둘다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죄를 물려 받게 되었고 그들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그들의 영혼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대하는 지식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혼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도 하나님을 지각하거나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실지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의 말씀을 귀로 분명히 들었습니다. 이때 영혼의 지성은 만남의 감각과 귀로 들은 감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으로 감각들을 조명하여 지각할 수 있는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에게는 직접 만남과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조우를 하지만 실지로 그의 영혼에서는 본질 그대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만들어진 우상의 출발이 됩니다.

반면 수만은 우상들이 만들어지고,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우상을 돈 주고 사서 자기부족을 지배하는 신으로 섬기는 부족종교 시대를 살고 있는 아브람은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신을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고, 그 음성은 귀에 분명히 들려졌습니다. 가인의 상태로 라면 아브람도 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제 마음대로 판단하고 이해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자기의 영혼에 새겨 그대로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의 지식이 아브람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져버린 것입니다. 곧 아브람은 그 말씀이 그의 영혼에서 활동하고 작용하여 그의 삶을 그 말씀대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아브람은 본래 가인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결코 진리의 지식을 자기 영혼에 새길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인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에 말씀을 새기시는 역사를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말인 사람의 지식은 그 본질이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이라면 사람의 말은 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사람의 말은 본질상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이기 때문에 죄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지식은 죄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모든 지식은 진리입니다.

아브람에게 나타난 사건은 죄의 본질로 가득채워진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새겨진 것입니다. 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씨를 뿌리는 자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기 교훈이 주는 의미는 사람의 영혼에 말씀을 뿌리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영혼에는 이 말씀이 새겨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했습니다.

갈바를 알지 못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이끌어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하자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12:7)

이때까지 아브람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고 움직이고 활동하였으나 사실 당시 사회 환경에서는 사방에 수많은 강력한 부족들이 각기 생존을 위해 진치고 서로 싸우고 물고 빼앗고 약탈하는 숨쉴 수 없는 위협에 던져진 위험하고 무모하기 이를 대 없는 생명을 완전히 내건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붙잡혀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이점에 있어서는 구약의 신앙과 전혀 구별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아브람처럼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새겨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이 새겨지지 않고 자기지식으로 복음을 이해하거나 인식한 사람의 신앙에 있어서 그 위선을 가인에게서 거울로 보는 것 같이 자기의 신앙을 보게 됩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채워진 타락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같이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사람은 그 새겨진 말씀이 영혼의 지성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조명역할을 함으로 하나님을 본질대로 알게 됩니다.

사도는 자기의 영혼에 복음이 새겨지지 않은 상태를 옛 사람이라고 했고, 복음이 새겨져 새사람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상태를 새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옛 사람에게서 나오는 행위가 아닙니다.

옛 사람 안에 새겨진 복음으로 새로운 지식과 지각을 갖고 하나님을 아는 삶으로 사는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참된 믿음을 구별하는 것은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새겨져 있느냐에 따라 구별됩니다.

결국 믿음을 정의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에 새겨지고 그 말씀에 의해 붙잡혀 사는 것을 말하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사람의 영혼에 새겨지고 그 복음으로 인한 새사람으로 성장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