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롬3:25)
또다시 우리는 믿음에 관한 주제를 말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을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믿음은 사람의 정체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말은 사람은 누구나 믿음을 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변할 수 있는 일시적인 믿음이 있는가 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은 믿음으로 구별됩니다.
믿음의 행위는 “객관적 사실을 영혼의 지성이 받아들이고, 그 받은 사실에 자기와 합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죽으시게 된 원인과 그 이유에 관한 지식을 인식한 후에 받아들이고 그 지식에 자기를 합치하여 자기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지식이 자기 영혼의 지성에 들어왔을 때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자기지식으로 생성 되어 지각할 수 있고 전인으로 인식하여 도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수많은 지식들이 들어옵니다. 그 많은 지식을 인식하여 동의하는 것은 사람의 구성이 하는 작용이므로 지식에 대한 인식과 동의는 전인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이 작용에 의해 사람은 지식대로 행동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복음이 사람의 지성에 들어왔습니다.
누구의 전도나 권유 혹은 설교를 통해서 지식이 들려졌고 지성에 들어오면 사람의 지성은 들어온 복음에 대해 판단을 합니다. 이 판단 작용을 생각하는 작용으로 오성의 작용 혹은 이성의 작용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사람의 구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에 입각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범하는 오류입니다. 이는 이성이나 오성의 작용이 아니라 영혼의 지성에서 일어는 육체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작용인데 아무도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이 작용을 느끼거나 감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의구성의 작용을 인식할 수 있는 최종 전인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사람으로 행동하고 움직이는 원인이 되는 지식을 생성하는 작용을 하는데 이 작용이 자동적으로 지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육체의 감각에 의한 표상을 받아야 하고, 그 표상에 대한 지식을 밝혀주는 조명이 있어야 합니다. 즉 육체가 객체를 감각하면 그 감각이 표상화 되어 지성에 반영되고 반영된 표상에 대한 지식을 밝혀주는 선재하는 지식에 의해 조명되어져야 비로서 지식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성이 지식을 생성하는 능력을 가졌을 지라도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이 없이는 결코 아무지식도 생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떤 감각을 가졌고 그 감각의 객체가 표상화 되어 지성에 반영되었다면 그 객체에 대한 표상의 지식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모든 만물의 존재는 바로 하나님의 지식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이 만물의 근원이고, 그 지식은 모든 만물보다 먼저 있었으니,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식,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지식들이 사람이 내는 지식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사람은 소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가지신 원칙인 선에 관하여 무지함으로 모든 지식의 규범이 되는 선에 대비하는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모든 창조 세계의 존재의 원칙으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 지음을 받은 세상을 보시고 좋았더라 말씀하시고 만족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질서와 조화의 원리인 선은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에 있어서도 조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사람이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사람은 스스로 지식을 생성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반드시 선재하는 지식의 조명을 받지 아니하고는 지식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 닮은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한 독립적이고 객관적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객관적인 판단에서 드러난 것1)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는 모든 지식의 본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가지도록 바로 이 지식을 인하여 사람 자기지식을 생성할 수 있도록 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었고, 그 형상 안에 있는 모든 지식의 본체인 본유지식이었던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졌고, 본유지식은 빛을 잃어 지성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성이 어두워졌고 그때부터 이미 가졌던 자기 지식의 조명으로 지식을 생성하여 가졌는데 이 지식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나 창조, 혹은 사람 자신에 관한 지식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왜곡되고 타락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사도는 에베소서 2:12에서 “그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세상에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성경은 깊은 여러 가지의 해석이 필요하지만 실지로 사도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외인 곧 관심 밖의 사람들이라는 것과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을 말하여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을 알수 없는 무지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중점을 두고 정의해 나가려고 합니다.
믿음은 “객관적 사실을 영혼의 받아들이고 그 받은 사실에 자기와 합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심과 그가 이방인에게 내어주심을 당한 후 우리에게 죽었으며 이제 다시 살아나셨다는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문자적인 한 문장으로 이해하고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장의 의미와 내용을 이해하고 지적으로 동의하고 자신의 존재와 합치하는 인식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이 복음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에 새겨지고 그 말씀에 의한 여러 가지 다양한 지식들이 영혼의 지성에 새겨져서 복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지식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옛 사람의 거짓과 위선 왜곡된 지식의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 지식을 가진 상태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내어주심은 무엇입니까?
그리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다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복음의 의미이고 이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이해되고 인식되어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 그리고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이라는 많은 사도의 지식들이 우리의 영혼에서 인식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바대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 데라의 집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다양한 신들을 섬기는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다신론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지식이었으며 그 지식이 아브라함의 영혼에 새겨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아브람이었으나 그 말씀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 말씀은 자기를 움직이게 하고 자기로 하여금 말씀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도록 강권적으로 그의 영혼을 지배하여 그를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에서 작용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 말씀에 이끌려 아버지집을 떠나 가나안땅으로 왔고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아브람은 그 말씀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먼저 말씀이 사람의 영혼에 새겨지고 그 새겨진 말씀이 그 사람을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행위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이끄심에 따라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이 그를 이끌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이끄는 객관적 사실이 영혼의 지성에 받아들여지고 그 지식대로 이끌려 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반드시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난 행위이지 자기가 믿는 다고 동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주 1) 하나님께 객관적 판단이란? 존재하는 모든 세계와 만물에는 하나님 외에는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지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식과 존재는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행위와 그리고 존재에 대한 가치를 순수한 객관적인 판단과 하나님께서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의 표현을 듣기를 지극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이 내는 지식이 하나님께 인식될 수 있는 코드가 같은 지식이어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을 향한 객관적 판단이 요한계시록 4:11에 나타납니다. 바로 이 판단은 객관자가 자기의 지식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표현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표현을 모두 인식하시고 만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은 이것을 향하여 지향되어 있지만 그것이 지식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지식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객관적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생성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는데 사람은 스스로 지식을 생성할 수 없으므로 지식을 조명하셔서 사람으로 지식을 생성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 형상안에 있는 본유지식인 것입니다. 사람은 이 지식의 조명을 받아 순수한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갖게 되는데 사람이 생성하는 모든 지식은 최초 본유지식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타락한 후에는 본유지식이 상실되어짐으로 이미 생성하여 가진 자기지식으로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왜곡되고 오류인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객관적인 지식이란 하나님 외에 존재로부터 스스로 자기지식을 드러내는 판단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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