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로3:24) 4,

생명있는 신앙 2013. 12. 2. 06:36

4, “이방인들과 화목

 

여러분들은 지금 받아들이기 아주 어려운 설명들을 듣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기존 교회에서 전혀 듣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에서 정의되지 않은 사고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마치 신세계를 만난 듯 새로운 사고가 설명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전하는 나 자신도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지나치게 사변적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판단에는 모든 설명의 증거들이 성경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 그것이 뒷받침 하는 증거들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약간 장황한 서술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지면에서 그런 설명들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진술들이 하나님의 선에 부합되도록 점차적으로 성경의 증거들을 짚어가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영혼에 복음이 새겨지는 것과 같이 말씀이 새겨져서 제시되는 모든 말씀들을 성령께서 조명해주시는 것을 이해되도록 점차적으로 덧붙여 갈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의 또 다른 진수에 이르는 진술들을 들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어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이방인에 관한 설명까지 했습니다.

이제 이방인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임으로 하나님과 화목이 되는 진술을 할 것입니다. 이 사상은 사도 바울의 사상이었고 에베소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에베소서2장은 이방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방인을 향하여 한 말로 하나님도 없고 약속들에 관하여 외인인 이방인들은 실지로 하나님안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약속들에 관한 외인이란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야 말로 하나님의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정욕을 일으켜 잉태하여 낳은 죄의 열매라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서 이방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너무나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은 사도가 깨달은 진리였던 것입니다.

이 서신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참으로 비참한 우리의 운명을 다시 한번 살펴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범죄를 원망하고 그들의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들의 죄가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지옥은 텅비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죽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하여 미친 듯이 분노를 드러내고 미워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분노가 용솟음 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조그마한 자비도 드러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보내심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는데,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죄가 그들의 눈을 가렸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리대로 알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분노를 드러냈고 미워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고(11:11)” 라고 말하는 사상에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담의 불순종의 죄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죄를 더하여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비극을 스스로 선택한 우를 저지르고 말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있었던 일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참 감람나무와 그 뿌리에 접붙인 돌감람나무를 비유하여 두 관계를 잘 설명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스라엘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왜면함으로 이방인에게 옮겨 왔고, 그 구원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원수요 비극에 처하는 이방인들의 처지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되는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은 멀지 않았습니다.

불과 20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이제 그 막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도의 증언과 같이 이스라엘이 시기하는 것이 정한 때까지였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이방인에게 열렸던 구원의 문이 점차 닫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교회들에서 급격한 세속화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이방인의 사역자들의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죄악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면 우리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개혁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이 시작된 이후로 교회는 자주 개혁되져 왔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역사해 주심으로 진리가 분명하게 드러났고 사람들의 영혼에 진리의 지식들이 새겨짐으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드러내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드러난 역사들이었는데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 역사의 주기에서 우리 이방인을 향한 구원을 위해 또 한번의 개혁 있었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말을 들으면 하나님께는 더 좋은 계획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선됩니다. 어차피 사람들의 죄악이 이 세상에 관영하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차라리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아담 안에서 계획하신 사람들의 구원이 이방인의 구원보다 더 시급한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비밀이고 사도는 이 비밀을 깨우쳐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의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우선적으로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외치는 일이 가장 시급한일인 것 같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11:25)

그러면서도 우리의 형제의 구원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더 한번의 개혁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점차 뒤로 물러가겠지요!

이것이 우리의 욕심이니 우리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치우친 생각을 갖고 있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전도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달려가도록 발걸음을 옮기게 할 것입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여러분은 아주 잘 알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관한 생생한 사실들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속한 이스라엘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영혼에서 일어난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을 떠나고 본유지식을 상실함으로 하나님의 영에서 영원히 떠나 버린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시고 그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향하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이것이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이 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하나님과 이방인의 화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사실을 들으려고 하다가 장구한 서술을 들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기록한 서신인 로마서 5장에서는 이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 곧 보편적인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죄에 관하여 대속의 죽음으로 화목을 말합니다. 물론 앞에서는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 구별이 없음을 분명히 증거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골로새서 1:22에서 이제는 그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라고 말합니다. 이는 골로새 교회가 이방인의 교회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향하여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분명히 드러내는 의미의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화목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사도의 사고를 빌려 여러분에게 아주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도의 사고에는 이스라엘은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라고 이방인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에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입니다.” 이 한 문장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학이 내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내어주는 것은 단순한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그 비참의 삶의 원인이 된 죄 값을 위해 한사람을 죽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단순한 내어줌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없는 그것을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줌으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에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속의 사상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자기들이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영원히 비참에 처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분노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극도로 미워하여 모든 분노를 하나님의 아들에게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 것은 당시에 로마군병들이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손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의 손에 못자국과 이마에 쓰신 가시관, 옆구리에 찔린 창은 바로 내가 한 짓이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바와 같이 우리는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죄의 열매로 태어나 죄를 짓는 일만 하는 사람으로 살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가는 소망이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손을 빌어 우리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내어주시고 우리의 분노를 쏟고 화목하자고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무자비하고 무정한 감정으로 분을 쏟아내고, 미워하여 인정사정 보지 않고 망치를 휘두르고 채찍을 휘둘러 아주 잔인하게 그를 죽였던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아시는 여러분은 이 사실 앞에 꼬끄라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선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고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복음을 심기시고 성령을 조명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복음은 완전하시고 선하시며 사랑 외에는 아무런 행위도 하시지 못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시고 죽으셔서 화목하자고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죽였습니다

용서도 없고,

조금도 인자를 베풀지 않고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피 한 방울이라도 남을 까봐 살지 못하도록 옆구리에 창을 찔러 피를 땅에 쏟게 했습니다.

우리가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보다 더 잔인한 고통으로 그를 죽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이제 만족했니

이제 우리 화목할까?”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제 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할 수 있겠니?”

내가 너를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제 너를 아들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죽였고, 분노를 쏟아 피를 빼앗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쏟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