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는 그리스도가 드리는 제사를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제사를 하시고 계십니다. 누구에게 제사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도의 의중에는 하나님께서 제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구약에 능통한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가말리엘의 수하에서 수학한 사람으로 장래가 보장된 최고의 학부의 사람으로 예루살렘 안에서 드려지는 제사에 관하여 능통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물의 의미는 누구 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드려지는 화목제물에 관하여 구약성경의 규례에서만 볼 수 있고 우리가 직접 그것을 행하여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의미를 실지로는 느끼거나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례에서 말하는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방법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화목제물은 레위기 3장에서 말하고 다시 7장에서 반복하여 말하는 규례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제사장의 성별식이나 나실인의 서원식 등에서 행하여졌습니다. 이때 드려지는 제물들은 당일이나 서원일 경우 다음날까지 먹되 이틀 안에 다 먹어야 했고, 삼일째에 남아 있는 것들은 불에 태워야 했습니다. 이런 규례에서 사도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화목제물이라고 보았을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화목제물은 제사장의 성별식, 혹은 나실인의 서원식 등에서 행해지는 제사였기 때문에 구별된 제사였습니다. 이는 평인이 아닌 구별된 사람만이 드리는 제사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제사에 속한 사람은 철저한 도덕적 적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반인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신 하나님 자신임을 알았습니다. 그가 직접 목격했고 보았기 때문에 이는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특별한 지식이 성령께서 조명해 주심이 그에게 있었습니다(골1장15~2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신 의미에 대해서는 제사를 드리는 주체가 아닌 제물에 주체를 두어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화목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은 이 기독교 안에서 뭔가 다른 의미를 가지는 전율하는 느낌의 징조를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가 이해하는 화목제물에 관한 지식을 상고할 때 부터 성령께서는 우리의 지성에 빛을 조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고난당하심,
버리심을 받으심,
신음과 고통,
그리고 죽음에서 보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제사를 집행하시는 제사장을 보게 됩니다.
내어준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죽이는 사람은 이방인인데 이 제사를 집행하시는 제사장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을 성령의 조명을 받은 이가 아니면 누가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린다?”
“과연 누구에게 제사를 드린다 말인가?”
구약에 분명히 기록하기를 화제를 드려질 때 향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으니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닌가?
그런데 무슨 뚱딴지 같이 개혁신학에 한 줄도 나오지 않고 언급될 수도 없는 해석을 말하려 하는가! 하고 비난할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화목제물로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제물입니다.
예수를 제물로 세우실 분은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예수를 미워하고 죽일 생각만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골고다의 제단에서 행해진 제사를 사람들이 실수라고 알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모르고 행한 엄청난 행위에 하나님은 그냥 당해주신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지하여 예수를 비난하고 핍박하여 고통을 준 다음에 제물로 바쳐 죽게 한 제사라고 말하는 어처구니 없는 무지가 낳은 실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실수한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몰랏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며 그의 희생에 감사하는 실지 사건과 지극히 이타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가 이를 화목제물이라고 분명히 말함으로 제사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돌리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목제물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향하여 제물로 이미 예수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 내어주심은 분명한 목적으로 화목을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화목은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있습니다.
인루의 조상의 첫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화목을 위한 제물에대한 처리 방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무엇인지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제사는 누구에게 어떻게 드리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여기에서 항상 생각하는 성경의 한 장면을 기억합니다.
약 43년을 시내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이 드디어 요단강을 건넜고, 길갈에 진을 치고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위해 준비하던 그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서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는 여리고 성을 돌라,"
"소리도 내지 말고 조용히 돌라,"
휼륭하고 유명한 설교자들까지도 이 성경의 본문으로 하나님의 기적적인 작전과 위대한 승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저는 그런 의미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저설교자가 과연 주님으로부터 설교를 명받았으며, 본문을 설교하기 위해 하나님을 대면하고 왔는지 자문하는 비판적인 마음으로 설교자를 비판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찢고 아파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실대로라면 하나님은 전쟁의 용사가 아닙니다.
당신께서 지으신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비록 범죄하여 이방인을 존재하게 했을 지라도 모두를 결코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존재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이방인들고 하나님의 아들들처럼 사랑하십니다.
단 사랑하시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하나님의 선 때문에 이방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이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아들들을 결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의 전쟁은 결코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작전이 실패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패하신 것입니다.
실지로 여리고 전쟁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은 애굽으로부터 탈출하여 노예에서 해방하고, 43년 동안 시내광야를 방황하면서 전갈과 불뱀의 땅을 지나온 이스라엘을 이방인에게 몽땅 "내어 주고" 이방인들과 화목하시려는 화목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내어주시는 교리"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사로잡혀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내어주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십니다.
그 목적은 화목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로 여리고 성 주위를 돌게 하는 하나님의 작전을 보십시오.
이런 작전은 세상에 없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지혜로운 지휘관은 결코 이런 작전을 구상하지 않습니다.
적에게 아군을 통째로 내어주는 지휘관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호수아서 6장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전쟁의 지휘관이 되어 보십시오.
연약하고 힘이 없으며, 노인들만 남겨두고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군사로 하여금 여리고 성 주위를 돌도록 하는 작전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성을 돌되 멀리 십리 밖 거리를 두고 돌까요?
화살를 쏘아도 닿지 않을 거리에서 돌까요?
그런 것은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명령하기를 성을 돌되 말도 하지 말고 소리를 내지도 말고 조용히 돌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알지 못하는 시간에 돌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지혜를 내서 여리고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그렇게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시간은 알 수 없으나 여리고 군인들이 다 내려다보고 있는 그 시간에 돌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뭘 말하는지 아주 잘 알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모두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죽이도록,
이스라엘을 비참하게 하도록,
하나님은 전쟁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먼저 패하시는 것입니다.
이 작전은 하나님께서 여리고와 화목하시려는 뜻으로 먼저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을 내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방인인 여리고에게 화목을 청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과 이방인의 화목"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여리고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그 화목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이 성을 돌고 있을 때 아무소리도 내지 않고 공격하지도 않은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점멸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 성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상해 보십시오.
가관일 것입니다.
억압과 공포,
잔인함,
이런 것으로 신과 신의 전쟁에서 자기 신이 승리하도록 드려지는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유명 드러마나 명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여리고 왕이 자기의 아들을 자기 신에게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행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이스라엘이 성밖을 돌고 있는 것을 종교적인 행위라고 보고 이는 신과 신의 전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기간동안 신을 분노하게 하는 어떤 행위나,
왕의 비위를 거스르는 행위,
자기 신에게 부정하다고 판단되는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처벌과, 자기 신을 강하게 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의 고통, 이런 것들이 행해졌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안은 지옥보다 더 고통스럽고 숨막히는 시간을 지낼 것입니다.
지금 여리고인들은 자기신에게 제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위에서 화살을 폭포수같이 쏘아대고 돌맹이를 굴리며 뜨거운 물을 쏟아부어 이스라엘을 멸망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고
하나님께서 여리고와 화목하시려는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숨을 죽이고 입밖에 말을 꺼내지 말고,
아주 조용히 성을 돌라고 하신 것입니다.
첫번째 날에 그냥 지나 보냈다면,
다음날에 반드시 이스라엘을 멸망시킴으로 일곱째 날까지 살아남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마음으로 반문하며 이 은혜의 말씀에 도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400년동안 종살이 하도록 고난과 고통가운데서 해방하여 시내산을 건너와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들어왔는데 멸망시키려 한다는 해석을 천부당 만부당하는 사변이라고 말입니다.
기록된 말씀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의미가 내포하고 있음에도 이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지극히 이기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가인이 제사를 드리는 마음과 같은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은 끝까지 고집하다가 가인처럼 하나님을 떠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사를 주제하고 계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보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내어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에게 내어주셨습니다.
화목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만한 생각으로 자기가 선하기 때문에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절대 에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이 되게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보세요.
예수께서 당신이 죽어야 한다고 말씀을 꺼내실때, 장담하면서 말했습니다.
주님 당신께는 절대 그런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며 호언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단호하게 호통치며 외치셨습니다.
"사단에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마16:23)
여리고에 내어주신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내어주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하는 희생제물,
여리고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화목제물이셨던 것입니다.
골고다 언던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현장에 서 있는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인정도 없고 잔인한 광기를 쏟아내고 피로 범벅인 흉측한 몰골을 하고도 원수를 향한 분노를 한없이 퍼붓고 있습니다.
자기를 내어주신 하나님은 여러분이 쏟아내는 분노를 다 받으시고 계십니다.
자기의 몸으로 여러분을 이 세상에 있도록 허락하셨던 것을 스스로에게 죄로 여기시고 여러분의 손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죽였고,
하나님이 더 이상 하나님이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분노와 미움을 쏟아내라고 자신을 내어주시는 제사에 제물로 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분노를 쏟아내고 지쳐 주져 않았을 때,
성령께서 우리 영혼의 지성을 밝게 조명하여 주실때,
어린 양처럼 반항하지 않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다시 성령의 조명에 의해 골고다 언덕을 비춰보면,
여러분이 분노를 폭발하여 죽인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친히 고통을 당하시던 그때, 우리는 우리가 한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죽인 것을 알게되고, 우리의 행위를 저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우리 자신을 찢고 크게 미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죄 덩어리라는 것을 그때 확실히 더 알게 됩니다.
이때 그리스도는 죽으셨던 몸을 일으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오히려 우리를 끌어안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우리를 받아 앉으시려고 크게 서셨습니다.
우리와 화목하셨고,
우리에게서 쏟아진 분노와 증오를 완전히 땅에 묻어버리시고 다시는 우리안에서 호라동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원수관계를 씻으시고 죄의 모든 것을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를 끌어 않으시므로 만물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졌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조명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새로운 지식을 갖게 하셨는가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지식이 여러분의 영혼에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사는 여러분이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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