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어느 면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서술을 말하기에 앞서 타락한 사람의 현재 상태에 대한 정체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에는 “변화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촉구하는 말씀이지 사람의 행복과 삶의 가치에 대해서, 성공적인 인생 방향을 가르켜주는 인생 지침서가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에서 가르치고 있는 인생을 성공하고 행복하게 하려면 성경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들과 같은 가르침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상과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삶의 모습 곧 양태이지 양태적 결과를 얻기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한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양태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으로부터 여러분이 얻어야 할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 우리는 복음을 말해야 합니다.
사람을 잘살고 행복하게 살도록 가르치는 강론을 이제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진리의 지식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여러분이 부자이거나 혹은 가난하거나, 혹은 삶의 좌절과 절망의 수렁텅이 속에 빠져 있어서,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접근 방법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양태를 위한 다른 길을 제시하여 어렵고 가망성이 없는 삶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하는 것 뿐입니다. 양태의 변화를 기대하는 성경을 인용한 가르침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경적인 것 처럼 보이고, 성경을 말하고, 성경을 인용하며, 성경에 있는 사건들을 말하며, 지극히 성경적인 것처럼 느껴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변화의 삶을 살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복음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여 새로운 양태의 삶을 살게 했을 뿐입니다. 혹자들은 이 과정을 통해 참으로 구원을 받은 다수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런 과정속에서 구원이라는 새로운 삶을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살펴 볼 때 제가 만난 처음 복음은 양태적인 복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계시지 않고 그의 가르침만으로 나로 하여금 이런 삶이 있으니 살아보라고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수많은 주의 제자들이 강단에서 이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곧 복음이 아닌 복음으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삶의 성패나 불행을 만난 슬픔 때문에 좌절하고 낙심한 사람을 회복시키고 용기를 복돋우며 삶의 방향을 전환시켜 절망에서 희망적인 삶을 되살리려고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면 성경이 지향하는 것은 사람의 삶의 질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중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조명되어졌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그리스도인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성경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에 맞추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본이 되는 삶을 살게하셔서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하셨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사람의 상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타락하여 범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 창조시에 아담을 지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을 때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을 작정하시고 계획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한 후 정욕을 일으켜 잉태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탄생을 허용하셨습니다. 이를 허용적 작정이라고 부릅니다. 앞에 있는 아들들은 작정에 의한 아들들이고 그 아들들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성경이 구분합니다. 저나 여러분은 이 지식을 중심에 새기고 새겨야 합니다. 우리의 원천은 죄이지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나 작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근원에 관한 우리의 정체가 분명히 우리에게 밝혀짐으로 우리는 비로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그다지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버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종착역은 지옥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비참한 운명적 비밀들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삶의 고통, 문제로 인한 아픔, 질병과 갈등으로 인한 우리의 고민을 벗어난 새로운 삶으로 인도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근원인 운명적인 출생과 존재의 비밀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이런 인생의 문제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우리의 죄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해서 그들이 온전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며, 정욕을 억제하여 작정되고 계획된 하나님의 아들들만 잉태하여 낳고,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세상을 일구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세우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주어 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구별된 백성들은 더욱 범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들이 정욕으로 낳은 이방인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은 삶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전혀 살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욕으로 태어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적대적인 자세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까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육체의 감각으로 말미암아 얻은 지식이 아닌 영원한 의식의 감각이 영혼으로부터 강력하게 전인에 솟구쳐 나옴을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미움, 원망, 분노등을 분출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자신의 존재와 미래의 비참을 우리의 영혼이 이미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범죄로 말미암은 정욕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하나님도 없는 자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방인의 정체를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방인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이전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을 미워했던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한 분노를 품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존재하게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미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가인이 질투하여 아벨을 죽이는 그 사건을 통해 이방인이 하나님의 아들을 얼마나 미워하고 그들이 참으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미워하되 하나님과 아벨을 동시에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이 되게 한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죄라는 사실과 그 죄로 말미암아 자신이 잉태 되었고, 이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에 처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관계없는 그야말로 잉여의 자식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존재하게 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므로 더이산 죄를 짖지 못하게 죽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의 비밀을 밝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한 아들들의 계속적인 죽음은 창조 계획이 마쳐지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는 위대한 실패가 되고 맙니다. 유한한 인간의 수는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수가 마치면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는 보잘것없는 파괴로 마쳐지는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계획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창조의 거룩한 완성을 계획하셨습니다.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셨으므로 그 계획까지도 하나님의 창조에 속하게 하셨으나 그 계획의 실현은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말에 처하거나 구원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구원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인데, 죄에서 구원을 받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죽어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더 이상 죽지 않도록 죽음을 끝내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과적인 행위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죽음과 화목이 필요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향하여는 대속의 죽음, 이방인을 향하여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하나님 자신이 분노의 제물이 되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사실 것인지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섬기는 자의 본을 사실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향하여 섬기는 삶을 살 것입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직 섬기기만 하실 것입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맞아 죽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실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아벨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이 있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영혼입니다, 실지로 가인 자신이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이 가인의 전인으로 하여금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켜 하나님의 아들들을 질투하고 죽이도록 미워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려(롬3:26) 1, (0) | 2013.12.10 |
---|---|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롬3:25) 6, (0) | 2013.12.09 |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롬3:25) 4, (0) | 2013.12.07 |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롬3:25) 3, (0) | 2013.12.06 |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 (롬3:25) 2, (0) | 2013.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