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려(롬3:26) 1,

생명있는 신앙 2013. 12. 10. 05:00

믿는 자를 의롭다하시려(3:26)

우리 믿음의 시작은 우리의 지성에 복음이 들어왔고, 성령께서 그 복음을 조명해주심으로 우리의 지성이 복음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많이 음미하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복음이 우리의 지성에 들어 왔다는 것,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관한 말씀인데 이 말씀이 지식으로 우리의 영혼에 들어 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됨으로 육체가 감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 들어 왔다는 것은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말씀을 들은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장면을 아주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복음이 들려졌으면 사람이 그 복음을 이해하면 될 것 아니냐

오성으로 느끼고 이성으로 받아들이면 복음에 관한 이해를 갖고 당연히 복음을 알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반문하는 작용을 일컬어 사람에 관한 분명한 지식이 우리에게 결여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부터는 결코 복음을 진리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 들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의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항상 복음을 받는 사람의 현재적 상태에 대해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타락한 죄인의 상태에서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만날 때, 죄인이기 때문에 복음을 진리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합니다.

죄인이란? 사람의 상태가 죄로 정죄받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상태는 육체의 모양이나 혹은 그 사람의 행위만을 강조하여 판단하는 말이 아닙니다. 죄인은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상태가 아니라 사람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주어진 판단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영혼의 지성에 있는 지식이 무엇이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성에 있는 지식으로 행동하고 판단하고 열매를 맺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 지식의 내용에 따라 그 사람의 본질이 결정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온전하다고 하고, 거룩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거룩하다고 하며, 선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선하고, 악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악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그 사람 안에 있는 선재하는 지식은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냄으로 그 본질인 지식이 그의 지성에 들어온 모든 지식들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선한 지식이 그의 영혼에 들어가 반영되면 거짓된 지식들이 선한 지식을 거짓되게 이해하도록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가인의 영혼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으니 가인은 하나님을 진리대로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인은 결코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진리이신 하나님으로 아는 지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자기지식대로 인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에서 분명히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으로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복음에 관한 지식이 진리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진리의 지식이 우리의 영혼에 선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조명해서 우리의 지성으로 하여금 복음이 복음대로 조명되어져 우리의 지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죄인에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은 우리의 지성에서 만들어지거나 생겨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줄 성령이 필요한 것입니다.(16:13)

하나님은 선하시고 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에 관하여 말하면 우리의 생각과 지식이 선에 대비되어 집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지식이 하나님의 선에 합당한가?” 라는 대비를 통해 우리 스스로 진리의 여부를 판단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선에 합당하지 않으면 우리의 지식은 거짓이고 왜곡되어 있고, 합당하면 우리의 지성에는 진리의 지식이 조명하고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의 삶과 나타나는 모든 상태들은 하나님의 선에 합당할 수 밖에 없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상태를 선에 부합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에 관하여 우리의 생각을 줌하여 성령의 조명하심이라는 교리적인 주제에 대비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교본에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부분에서 삼위 성령의 사역을 보고 있습니다. 삼위이신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일은 조명하시는 일에 집중하여 보고 있씁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조명하시는가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창조에 적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실현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피조물인 사람에게만 국한하여 적용한다면, 성부 하나님은 말씀하심으로 지식을 내시고, 그 지식대로 실현하시는 분이 성자 하나님이시고, 실현된 것을 보존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모든 사역을 한분이 독단적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시므로 상의하시고 결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결정에서 드러낸 것이므로 후회가 없으시고 완전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방향은 하나님의 창조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만약 창조하시는 본질적인 방향으로부터 어긋난다면 하나님 자신이 선에 합당하지 않게 되고 이것을 선하다고 말씀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우리의 구원, 곧 이방인의 구원에 적용시켜 보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이라는 근본적 존재의 시작과 근원은 하나님의 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함으로 잉태하게 될 것을 아셨고, 그들의 존재를 허락하셨으나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고 모든 약속들에 대해서 외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 존재함으로부터 비참에 처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로 이미 정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를 근원으로 하여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정욕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의 창조계획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을 잉태하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계획대로라면 이방인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범죄할 것을 아셨고, 그 범죄로 인하여 정욕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관계없는 이방인들을 잉태하여 낳을 것을 아시고 허락하신 것 뿐입니다. (58:3, 51:5)

여기에서 우리의 존재가 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은 이미 희미하게 알고 있었으나 분명히 거울로 보는 것처럼 보게 되니 우리가 더 슬픈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적 존재인 이방인이라는 이름표,

죄의 열매이고, 정욕으로부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사랑 받을 수 없고 인애를 누릴 수 없는 비참한 운명적 존재임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런 운명적 존재가 바뀌어 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끊으셨고, 다시는 죄에 속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것을 믿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이고 이 복음을 그들의 영혼의 지성에 새겨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끊으셨으므로 죄에 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은 믿으면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반면에 이방인들에게는 처음부터 영원히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화목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를 존재하게 한 비참한 운명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쏟아내는 원수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역사위에 또 하나의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므로 흐트러진 창조의 질서를 옛 그대로가 아닌 새로운 질서로 회복하셨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처음부터 이것이 있었습니다.

단 계획에 속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바로 이 이를 행하시는데 그것이 이방인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이방인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질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에 대비하여 볼 때 이방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것을 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음이 이방인인 우리의 지성에 심겨지므로 복음에 의한 진리의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니고대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에 복음이 심겨짐으로 그 심겨진 복음이 우리의 지성에서 새사람이 되는 뿌리가 되어 우리가 거듭나게 되었고, 그 복음에 의해 지식을 가짐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복음이 사람의 지성에 새겨져 새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그 새 사람이 하나님을 향항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만약 이 복음이 심겨지지 않으면 자기의 지식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는 가인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자기의 생각대로 받아들이므로, 하나님을 지역적이거나 협의적으로 장소에 국한하여 존재하시는 분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떠나 놋 땅에 거하여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는 지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장소에 국한되시는 분이 아니라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놋 땅에도 거하시므로 가인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을 피하여 떠났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영혼에 복음이 심겨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복음을 귀로듣고 감화를 받았거나 혹은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종교인에 불과하지 결코 거듭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람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의지를 일으키는 영혼의 지성에 복음이 새겨져 있는 심겨진 복음에 의해 하나님을 알고, 그 아는 지식의 근거에서 의지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행하는 것입.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복음을 가진 사람이 복음에 의한 자기지식으로 하나님께 고백한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주시는 것이지, 복음을 듣고 믿음을 표현할지라고 지성에 복음이 새겨지지 않은 상태로 믿음을 말하는 것을 참 믿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의롭게 보시고 의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드디어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전에 올라왔습니다. 2013530일부터 시작한 로마서 3장이 1210일에 이르러 26절을 시작하여 칭의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사상을 온전히 설명할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정상적으로 설교를 한다면 아마도 10년은 족히 걸리고도 남을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세하기 보다는 많은 부분을 중략하며 넘어 왔습니다.

본래 저는 로마서를 20144월중으로 마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 본다면 어림없는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만큼 성경에 관하여 무지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로마인에게 말하는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 복음의 중심을 향하여 갑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우리의 영혼에 새겨지는 성령께서 조명해주시는 지식에 의해 우리를 의롭다 불러주시는 칭의였습니다.

칭의란?

본질은 의가 아닙니다. 그런데 의라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실지로는 아들이 아닌데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은 양자와 같은 의미로 의인이 아닌데 의인이라고 불러주는 것입니다. 이 칭의 근거는 믿음이고 믿음의 근거는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후로 우리의 사고에 비참한 운명에 처한 이방인이라는 사고를 결코 벗지 않고 우리가 행한 "하나님을 죽임"과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