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사람이 의를 행치 아니하였다고 의에 관하여 일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의란?
피조물인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할 도리로서 목적하신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말하고 있는데 사람은 이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요16:10)”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의는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함 곧 선에 부합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고 “아버지께로 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그 뜻에 따르는 선에 부합한 삶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이 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곧 율법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은 사람이 성경에 나타나고 실지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의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는 이방인에 대하여 상대적인 것이지 그들이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고 아닙니다. 분명하게도 그들의 의가 허울뿐인 것임을 하나님 아들이 이땅에 오셔서 의의 삶을 보여주심으로 그들의 불의가 드러났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자기들 나름의 의의 개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의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의를 비추어 볼 때 전혀 대비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리스도로부터 아무런 정죄할 만한 고소의 조건을 찾지도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의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를 정하여 이방인에게 죽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들의 불의는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불의하다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 16:10)”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롭게 들린 것이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말일 것이지만,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정죄하고 각자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누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들 스스로 자기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법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들의 불의는 쌓여만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탠데 의에 대하여 말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데 너희는 거기에 오지 못할 것이다” 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귓가에 맴돌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너희가 스스로 의롭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의는 너희들이 말하는 의미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내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증명할 것이다” 라는 의미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는 삶의 결과를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라는 의미는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가 아니면 장소를 불문하고 너희는 결코 나를 볼 수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천국에 가지만 너희는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인이라고 자칭하는 이스라엘인들이 천국은 자기들의 세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그토록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선민이라는 유대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그들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돕고 섭리하신다고 굳게 믿고 있는 자기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으며,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우회적인 모독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자기들의 중심이 되시므로 자기들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가진 것은 곧 자기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일절 의식도 없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개혁교회에 속한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개혁교회의 교회 인도자들에게 너희는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아마도 그들도 유대인들과 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자기들의 의에 너무 깊숙이 빠져있습니다. 지극히 배타적이고 보수적이며, 또한 개혁적 의미에 대해서 지나치게 적대적입니다. 이미 그들은 주님께서 사도 요한을 들어 말씀하신바와 같이 이름뿐인 신앙만 가질 뿐이지 그 본질에서는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다른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개혁교회를 사랑하고 개혁교회인임을 기쁘게 생각하는 저는 오늘날 개혁교회가 담당해야 하는 책임에 대해서 결코 함구할 생각은 추어도 없습니다.
그들은 개혁교회를 추구하면서 문자적으로만 개혁교회를 추구할 뿐, 실지로는 길거리에 박힌 걸림돌처럼 단단히 박혀 빼낼 수 없는 보수주의자들이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이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에 대비한 말씀입니다.
사도는 이를 분명히 말했습니다.
울법을 행함으로는 의를 얻을 자가 없습니다.(롬3:20. 갈2:16)
여기에서 또 다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 자신의 정체를 살펴보는 것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있어서, 존재론적으로 현 상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문제가 없는지 깊이 묵상하고 생각하며, 곰곰이 되씹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개혁교회의 교리체계를 세운 위대한 신학자이며 설교가인 개혁자 Jhon Calvin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사람이 자기를 알지 아니하고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를 스스로 파악하지 않고 말하는 어떤 주장도 결코 옳은 논리나 설교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옷 매무세를 살펴 자기가 어디에서 놀았으며 살다 왔는지를 살피지 않고, 자기의 지나온 발자취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할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기 때문에 자신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의의 모범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관하여 생각할 때마다 성경에 기록된 인류 조상의 첫 아들 가인의 삶을 통해서 사람이 무엇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확인하고,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가인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주시려고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인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 그리고 질투 미움으로 땅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고 분출하는 용암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삼켜 녹여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모든 미움과 분노와 질투의 시작이었고, 그에게서 나온 미움과 질투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는 것을 말학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지만(창4:6,9,15),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창 4:5,9,13,16)
이처럼 우리도 가인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자주 아니 전 생애를 하나님 면전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욕하고 또는 거짓과 죄를 서슴치 않으며, 스스로 가인처럼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분명히 가인과 같이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벗어나 살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없는 안계신 곳이니 마음대로 행동하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진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영혼의 지성에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가인이 보여준 사람의 상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인식으로부터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의 현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아야 하는데 자기 안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무지한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른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자신에 대해서 온전하게 지식을 가진 사람은 없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지식을 가지지 못한 지적인 어두운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기 스스로 지식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지 못한 주관적인 뿐입니다. 오늘 이 시간 존재론적으로 우리의 현 상태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타락된 인류의 후손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 다른 곳에는 없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자연적 본성의 상태에서는 우리는 참으로 무지에 깊이 빠진 비참한 존재임을 발견할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타락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성경이 말하고 있고 사도가 말하니까 타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상태에 유도된 많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런 사람들이 개혁교회 안에 대부분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들 가운데 우리 자신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지나친 왜곡된 확신이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왜곡된 진실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이 분명히 그것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하나님을 왜곡되게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입니다.
사람이 보고 목격하고 만지고 경험하였으나 경험한 그 사람의 상태가 잘못되어 경험한 모든 사실들을 왜곡되게 이해하고 인식한다는 것, 사람의 타락을 인식한 모든 사람은 이점을 명심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저와 여러분의 생각과 지식들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첫 인류의 조상의 첫 아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에게서는 결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수많은 지혜자들이나 지식자들이 단 한마디라도 진리를 스스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지성에는 무지가 가득하여 생각하고 깨우친 모든 지혜들이 가인처럼 왜곡된 것일 뿐 진리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무조건 가인으로는 안되니 예수일 수 밖에 없다는 무 상식적인 태도로는 절대 안됩니다.
하나를 알았다고 해서 다음 것은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가인을 알았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니라(요17:3)”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의를 알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오심, 삶, 죽음, 부활 속에서 드러난 사람에게 부여된 지식을 듣고, 사람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결코 참된 개혁교회의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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