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의를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은 기독교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이름을 붙여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기독교라는 창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경건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천주교와는 달리, 마치 성공학을 가르치는 교수와 진지하게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있는 강의실과 같습니다. 여러 강의실 중 어떤 강의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가 하면, 어떤 강사는 성공을 위하여 부지런하고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며, 다른이는 하나님께 잘하고 교회를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공하게 해준다고 성경에 약속 했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강사들마다 강의의 주된 내용은 어떻게 성공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정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정의가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를 보일지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강사는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어떤 강사는 지역성으로 편중되어 있으며, 어떤 강사는 정치와는 무관하여 예수님이 그렇게 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 까요?
예수께서는 정치와 무관하게 행동하셨을까요?
그랬는데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추종했을까요?
“정의”
그것이 무엇인가요?
철학자들이 말하는 정의가 진리인가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미가3:1)”
이 말씀은 오늘 교회에 다시 울려퍼지는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2, 이질적 복음을 배경으로 성장한 기독교.
두 번째로 오늘날 젊은이들은 복음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방인에게 내어주었고,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을 잔인하게 십자가에 내어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흘만에 다시 살리시고,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에게 다시 보내셨습니다.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은 이방인에게 죄를 묻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자기를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주셨습니다.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지식입니다(롬1:17).
그러나 오늘날 젊은이들은 이 복음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공주의와 인생의 행복을 주장하는 복음,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만능복음을 들었습니다.
대표적인 복음의 내용이
“예수 믿으면 복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행복합니다”입니다.
이 복음이 주는 의미는 인생의 문제와 불안과 근심과 걱정이 있는 것은 곧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성공이 필요한 사람, 문제 해결이 필요한 사람만 가득합니다.
젊은이들은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 복음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들려오는 복음에 대해서 참과 거짓을 구분해 볼 수 있는 기준이 없습니다. 어떤 경로든지 그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듣게 되고 복음을 좋아했을 때 그들의 삶에서 복음의 역할이 너무 이질적임을 고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역할을 드러낼 수 없는 이기주의적인 역할에 갈등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이 주는 당위성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배운 복음이 베타성, 이기주의적인 관념, 패쇄성으로 인하여 갈등하게 됩니다. 오히려 세상이 가르치는 지식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지식보다 더 나았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하는 복음은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복음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방인이라는 삼각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이방인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시는 이유/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것,
두 번째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내어주는 것,
세 번째로,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
네 번째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
다섯 번째로,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게 보내
어지지 않고 이방인에게 오신 것,
여섯 번째로, 이방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양자 아들이 된 것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의미입니다.
성공, 행복,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예수님과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복음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개신교회는 복음을 성공과 인생의 행복, 그리고 문제 해결의 만능으로 바꾸어 버렸고 그 바꿔진 복음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3. 용서와 관용이 없는 기독교
종교개혁이후 기독교는 개교회주의 원칙으로 인하여 극복할 수 없는 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주의가 형성되어 분파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이념화로 변질되었고 결국은 배타적 논리를 발전시켜 정죄하거나 혹은 이단으로 규정하는 무자비한 정죄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개 교회에서 나아가 개 교단으로 치달았고, 분파를 조장하며 결국 미워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신학을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용서와 관용을 배제하게 되었고 목사들의 명예욕과 교권으로 까지 변질 화 되어 결국은 교단 분열과 강단교류 금지라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교회에 드러냈습니다. 결국 교회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라고 외치고 있고 자신은 희생하지 않으면서 희생을 강요하는 집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정작 자신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 교단과 분파를 만들어 배타적이면서 사랑을 외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4. 패쇄주의적인 기독교
오늘날 교회는 자기만의 성을 위해 높은 장벽을 쌓고 그 곳에 들어온 사람을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나간 사람을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지나친 패쇄주의에 갇혀 있습니다. 더군다나 각종 이단들의 출현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는 나뉘어진 신학과 교단으로 인하여 점점 더 자기중심의 패쇄 주의에 빠지더니 결국은 각종 이단들의 출현으로 더욱더 자기 우월주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더 나아가 개교회주의는 교회의 대형화를 낳았고 이는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을 빼앗아 갔으며, 이를 성공이라는 저울로 판단하였고 결과적으로 교회의 왕국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교회는 크고 높고 아름답고 생명력 있게 하는 것이 경쟁적으로 치달았고, 자기교회만이 참교회라는 보호주의와 패쇄성을 더욱 부추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 밖에서 성도들간의 교제는 있을 수 없는 위험한 일로 간주 되었고 수많은 이단들이 기존 교회를 공격하여 무너뜨리려고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이기주의적 기독교
성공주의 복음에서 성장한 교회는 당연히 성공 지향적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공은 그 사상의 기본이 경쟁적입니다. 성공의 상대편은 패배이고 패배는 성공하지 못한 경쟁에서 실패한 상대입니다.
개신교회 대부분의 복음은 인생이 힘들고 고달프고 어려운 것은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한 원인에서 비롯되는데 그 성공을 성취시켜주는 하나님을 붙잡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보여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이 그것을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셨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죄를 범하고 죄의 삶을 살고 있는지는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로 자기입장에서 자기들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패쇄주의로 가게 됩니다.
6. 물질 만능의 기독교
교회가 개교회주의로 운영되다 보니 자연적으로 성공주의적인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성공주의는 교회운영은 목사의 운명과 같습니다. 자칫하며 성경적인 방법 보다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모으고 교회를 건축하고 나중에는 대형교회가 되게하는 이상한 모양을 가진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쩌면 개신교회는 사람의 진실성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타락을 갈 수 밖에 없는 취약점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개신교회가 참된 복음을 가지고 시작하여 그 복음을 지향하여 나아간다면 타락의 비극을 가지 않을 것입니다. 성공주의적인 의식에서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반드시 물질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해졌고 결국 교회는 물질의 흐름에 따라 운명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왕성했던 유럽과 북미 대륙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물결에 휩쓸려 쇠퇴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젊은이들이 교회에서는 자기인생의 미래를 찾을 수 없음을 알고 떠나게 된 것입니다.
비로서 교회는 종교의 한 일원이 되었고 교회는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서비스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의 필요를 체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제 당당히 헌금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서 이제는 반 구걸하는 위치로 뒤바꿔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니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 교회에서의 역할과 명예까지 주어지고 결국은 교회가 명예장사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7. 하나님이 없는 대형화된 기독교
이기주의적인 개교회는 자꾸만 능력이 있고 설교를 잘하는 목사에게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그런 목사는 더 성공적인 교회를 이끌기 위해 큰 건물을 건축하고 더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 세력을 확장합니다. 결국 수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는 더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와 희생을 요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협력하고 함께하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필요로한 교회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든지 흩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커다랗고 권위가 있는 교회이지만 내일은 허공에 매달인 빈집이 될 수 있고, 건물은 언제든지 백화점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반드시 겪게 될 실패의 날에 오게될 비극입니다. 우리는 그 날들을 보고 있고 그날들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미래 교회는 너무도 불확실합니다. 성공 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는데, 오늘 세워진 대형교회는 내일 실패를 거울처럼 확실히 미래를 비춰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공과 실패만 있습니다.
복음은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가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젊은이들이 자기들의 인생을 맡기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교회인가?
오늘날의 복음이 말하는 성공적인 인생을 확실히 담보하는 그런 교회인가? 고민하고 교회는 이 점에 대해서 젊은이들에게 확실한 답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더 큰 짊을 지우고 있습니다.
지금의 능력있는 젊은 목사처럼 교회를 이끌 자신이 없는 부담감,
그러나 교회는 모든 것을 젊은이 네가 하기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의식을 가지지 못한 젊은이는 이 답변을 듣고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결코 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성공한 목사만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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