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지식을 발하여 세상을 지으시고, 지음을 받은 존재들의 죄와 정욕으로 이렇게 덤으로 얻어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당신의 아들들로는 부끄러워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음을 받은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알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발하여진 지식은 사람의 영혼에 새겨져 있고, 그 지식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 지식은 하나님께서 계획에 의해 존재하기로 예정되었던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은 정욕을 근원으로 이 세상에 존재한 이방인인 우리들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안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셨고, 하나님은 지식을 발하셔서 사람의 영혼에 있게 하셨고, 그 지식에 의해 하나님을 알게하셨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아니고는 하나님과 소통할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발하여 주신 지식에 의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우리 지식을 생성하고 생성된 그 지식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창조주의 지식이고, 사람의 지식은 피조물의 지식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식을 직접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사람의 지식으로 변환하여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논한 것은 율법이 진노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율법과 진노에 관하여 이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지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직접 이해할 수 있도록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을 우리의 영혼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이해하여 그 지식이 우리의 전인에서 작용하여 율법대로 삶을 살게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율법의 의미를 이해하며 해석하려고 할 때 율법은 이미 왜곡된 지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해석하여 토라를 만들고 선생들은 탈무드라는 지혜서를 만들어 그들의 신앙의 표본이 되게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사람에 따라 각자 자기의 색깔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경을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지만 이를 해석하는 목사나 설교자들마다 제각각 다른 의미를 드러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적용하는 상황에 따라 수만가지의 의미를 드러냅니다.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은 제가 성경을 기존의 설교자들과 다르게 보신다고 말할 것입니다. 진실일까? 매우 의아스럽습니다. 성경은 율법을 직접 받은 이스라엘이 해석한 의미를 예수께서 부정하셨다고 말하고,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로 인하여 예수를 미워했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다가 사도는 예수그리스도를 다메색 도상에서 만났습니다. 사도가 만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승천한 성자 하나님이 사도를 직접 만나 그에게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의미로 볼 때 선지자의 소명을 받은 것이지만 실지로 사도의 소명은 선지자가 아니라 유대와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실을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시간의 역사위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일어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도를 불러 그로 하여금 온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부르는 입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는 이 소명에 따라 아시아와 유럽을 향하여 복음을 외쳤고 수많은 이방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했습니다. 사도가 유대인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그들은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율법도 그들의 것이고 예수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왔으나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방인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임을 말하면서,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림으로 그 복음의 사실이 이방인에게로 옮겨 왔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도의 이해를 진리라고 믿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에 이해 사도의 영혼의 지성애서 조명되어 생성된 지식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유대인이 율법을 해석한 내용과는 전혀 다릅니다. 유대인의 율법은 법규인 반면 사도가 이해하는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의 진정성이었습니다. 이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규입니다. 반면에 사도가 생각하는 율법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율법을 무겁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람을 억압하는 족쇄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율법을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되었고 바울은 이 의미를 자기의 영혼에 받아 새겼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의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 법규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사랑”(마22:37~39)이라고 했습니다. 왜 율법에 관한 예수님의 해석과 유대의 율법사들과의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까? 유대인은 율법을 규범으로 이해했는데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지식으로 하나님의 지식인 율법을 조명하여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이해하기 위해 조명하는 자기지식” 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제가 이 말씀들을 하나씩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옆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대인과 예수님의 율법해석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자기지식으로 율법을 조명하여 자기지식을 생성한 반면 예수님은 성령의 조명에 의해 율법을 해석한 결과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우리가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해 모든 지식들을 진리대로 이해하도록 하기위해서 입니다. (요16:13) 그러므로 이 그림으로 살펴 볼 때 우리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안에 있는 우리의 모든 지식들은 무지와 결함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거짓된 지식들 뿐입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칭한 이스라엘이 더욱 거짓된 지식으로 살았고, 가인처럼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했고 결국은 죄를 범하고 정욕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어도 그들은 그 율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이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리의 성령이 조명해주시지 않았으며, 설령 조명해 준다 해도 정욕에 의해 진리를 거스려 거짓되고 왜곡된 자기지식의 조명으로 얻은 지식에 치우치는 죄를 더 사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귀하게 쓰셨던 주의 종 사도 바울이 그 비밀들을 로마서에 기록하면서 거짓되고 왜곡된 자가지식으로 부터 일어난 정욕으로부터 멀어지기를 간절히 원했고 스스로 절제의 삶을 고백한 것으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로마서 1장 24~27로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정욕의 자식들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팔을 벌려 환영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 부를 아무런 자격이 없는 그야 말로 원수인 우리와 화목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화목하셔야 이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 세상이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 것이며 저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나의 죄와 정욕으로 말미암은 저들을 위해 살 것입니다. 저들은 나의 형제이며 이스라엘의 죄의 열매들입니다. 아버지의 선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우리가 받을 은혜가 없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에 유일하게 한 분 뿐이신 선하신 아버지께서(마19:17) 진노를 드러내시고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불행을 등에 지고, 존재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만으로도 지옥은 그만큼 넓어질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아무런 유익이 없는 잉여의 존재일 뿐인 우리를 향하여 눈을 돌리셨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가질 수 없으며 의 비참한 비참하고, 하나님도 없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 끝에 있는 존재들이지만, 우리를 향하여 팔을 벌리시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형상이 없으시고, 모양을 가지신 것이 아니지만,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지식으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는 지식으로 다가오시고, 소리를 발하여 말씀하심으로 피조세계에 나타내십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예수께서 피조세계에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라 하신 것을 보면 영이신 하나님이 형상을 가진 피조물에게는 지식으로 나타내셔도 충분한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사람으로 나타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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