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진노하는 율법 6(롬4:15)

생명있는 신앙 2014. 10. 4. 10:41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은 그대로 육신덩어리 뿐입니다.

영혼에는 아무런 지식이 없기 때문에 사람으로 인식하거나 지각하지 못합니다. 의식은 없으며 깨어있거나 객체들을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인식하고 지각할 수 있도록 지식을 영혼에 넣어주셨습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발현된 지식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었고 영혼에 심겨졌습니다.

늘 말씀을 드린바와 같이 만약 사람이 심겨진 그 지식대로 의식하고 지각하여 산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를 분명히 보여 증거 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10:38, 14:10,11,20, 17:21,23) 그것은 아버지께서 실체로 그리스도안에 거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영, 곧 지식이 그리스도안에 있었고 그 말씀대로 인식하고 지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에게 나왔고 사람도 하나님에게 나왔습니다.

피조물이 자기의 존재의 근원이 되는 지식을 자기 안에서 자기의 지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이것이 창조주가 또 다른 창조주가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지식으로 도무지 조화되지 않은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창조주의 지식을 그대로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것은 논리적 명제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지식을 그 본질대로 인식하고 지각하여 행동한다면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에 의해 자기지식을 생성하고 그 지식으로 인식하고 지각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초 사람은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고 형상 안에 있는 지식도 잃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예수께서는 어두움에 처해진 상태, 곧 소경(9:39)이라고 표현했고 사도 바울도 역시 유대인들을 칭하기를 소경이라고 했습니다.(2:19)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이 소경이 되었다는 표현은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람이 repair 대상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 만들 때 상태에서 의도하신 방향에서 스스로 벗어났습니다.

완전하게 만드셨는데, 그 완전함이 사람에게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이었습니다(28:15).

그 모양은 이렇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로마서를 설명하면서 여러번 반복을 드릴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처음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고 마침내 사람의 행동을 위해 눈을 열고 세상을 보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대자연과 온 세상, 그리고 온갖 사물들, 그것들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아담과 하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하와는 아담이 있었기 때문에 아담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아담이 온 세상을 보고 그 세상의 아름다움과 눈에 보이는 사물들과 온갖 객체들로 인하여 감동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장발장이라는 소설에 나타난 주인공 모글리였습니다.

모글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곧바로 지구상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 늑대소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20년 인도 정글에서는 늑대가 키워 성장시킨 두 명의 소녀(아말라 카말라)가 발견되었습니다. 교육자들과 목사가 이들을 교육시켜 사람답게 살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안타깝게도 한 소녀는 1년 이내에 사망하고 다른 소녀는 단 97개 단어 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9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연한 사건일까요?

말도 못하고 성격은 늑대들처럼 사납고 먹는 습관과 생활양식이 늑대와 늑대였고 직립보행이 불가능했었습니다. 이는 사람으로 태어났는데도 성장환경에 따라 학습이나 지식의 정도가 차이가 있다는 것이 실증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지식의 습득을 위해서 일정기간 동안 적당한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갖 태어난 어린아이를 무인도 섬에 방치해 둘 경우 이 아이가 어떤 상태로든지 수년이 지나 죽지 않고 성장했다고 가정하면 이 아이의 지능 상태는 어떨까?

일반 가정의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처럼 언어를 구사하고 지식을 가지며 문화적인 의식을 가질까?

생각도 하고 지식으로 연산도 하고 문화를 만들어 살 수 있을까?

아닙니다.

그 아이는 지능발달이 멈추어진 동물과 같을 것입니다.

저는 이 지구상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환경에서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사람으로 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고래로부터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버려졌고 인간으로 살지 못한 처참한 운명으로 태어나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들을 알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처음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 보세요.

그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지만 그 형상으로 인하여 지식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 지식이 모든 지식이 아니라 당시의 환경에서 얻은 소수의 지식뿐이었습니다.

이 지식이 아담 안에서는 작용을 했고 드디어 자기의 영혼에서 지식들로 연산하게 되었을 때 비로서 오류된 지식이 그들 안에서 일어났고 이 지식들로 행동함으로 비로서 범죄하게 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은 거짓된 자기 안에서 일어난 거짓된 지식의 유혹을 절제하거나 이를 극복하는 어떤 지식의 발현으로 아담이 강력하게 거절하는 자기 절제를 할 수 있었다면 아담은 반드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묻지 아니하고 행한 그 행위가 흔히 인식할 수 있는 교만이었습니다.

교만은 곧 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선 이상의 자아 결정으로 발현되는 지식의 발현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음을 받고 지적능력이 발현되어 삶을 시작한 아담에게 실제적인 관계를 위해 행위명령을 주셨습니다.

이는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으나 자기 안에서 자기에게 지식을 얻게 하는 모든 작용들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행위언약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어떤 관계를 위한 만남이 없으시다면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행위 언약을 아담과 맺으시고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셨으나 아담은 그 언약을 무시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짐과 지식의 상실을 얻게 되어 즉시 어두움이 찾아와 소경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의 영혼에는 즉시 어두움이 찾아왔고, 이후로부터는 자기가 경험하고 보고 느끼며 접하는 모든 객체의 사실들과 객체들에 대해서 조명을 받지 못하게 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아담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그 영혼에서 작용할 때 얻은 소수의 지식들만 남아 있습니다.

죄를 범한 아담은 이 소수의 지식으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무지와 오류 그리고 왜곡된 지식을 얻게된 결과적 상태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아담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의 규범을 따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급기야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하여 가인을 낳는 불행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태의 변화는 최초에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진리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지만 변화 이후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위의 규범이 되는 선재하는 지식을 상실한 상태 곧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결정적으로 행위의 규범이 없는 무질서하고 조화롭지 못한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영혼의 지성은 자기가 행동하려는 그 지식을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에 의해 생성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지식으로 행동에 대한 지식을 가진 상태입니다. 이렇게 생성한 모든 지식은 그러므로 자기의 행위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 판단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자기의 판단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상태의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반드시 옳은 행동만 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옳지 않은 행동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옳은 행동에 대한 지식을 가지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두셨고 그 형상안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율법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태가 변화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에서 죄의 유무가 되는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죄라고 판단할 수 있는 어떤 지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는 사람은 그 모든 행위가 본질적으로 죄입니다. 전인적으로 죄라고 판단하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지성에서 생성하는 지식으로의 모든 전인적인 행위가 본질적으로 죄입니다.

자범죄라는 것은 죄의식이 없는 사람이 어떤 행위를 죄라고 판단하여 규정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규정하는 자체도 본질적으로 죄이므로 죄가 죄를 죄라고 규정하는 아이러니한 사실이 사람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범죄라고 판단하는 그 규범은 죄라는 본질로 객관적으로 죄를 규정하여 본질 자체가 죄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을 선하게 규정하려는 죄의 속임입니다. 엄격한 자범죄는 죄의 열매인 사람으로 태어나 생각하고 그 생각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마음의 모든 작용에서 일어난 행위와 아직 실행되지 않은 행위까지도 죄이므로 실지로 타락한 사람의 삶의 모든 행동이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죄 이후의 모든 삶은 자체가 죄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있는 죄가 얼마나 교묘한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행위 가운데 어떤 행위를 죄로 보게하고 일부분이라도 선한 것을 인정하려는 악의적인 속임이 있습니다.

사도는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사람의 죄성을 명확하게 말하지만 특히 8장에서 육신과 영으로 구분하여 선한 것이 전혀 없는 육신과 생명의 삶인 영을 말하면서 육신으로 사는 사람들의 죄성을 낱낱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만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육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습니다.

무엇을 육신의 생각이라고 할까요?

너무도 쉬운 말처럼 들립니다.

어쩌면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은 더 쉽게 이해 시켜 준다면서 외국어를 가져다 의미를 해석하려고 합니다.

마치 이렇게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헬라어로 το γαρ προνημα τηζ σαρκοξ이렇게 읽습니다.

이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이 헬라 말이 여러분에게 충분한 이해를 줍니까?

το γαρ 는 두고 προνημα를 살펴 보겠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단어가 어떤 의미로 쓰였느냐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확인하여 의미들을 밝혀줍니다. 우리가 이런 해석을 무시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반드시 이런 탐구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탐구가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대신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προνημα는 신약성경에서 4번 쓰였는데 바울서신에서만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본래 προνηω” “생각을 가지다”, “의견을 가지다.” “판단하다.”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여기에 τηζ σαρκοξ라고 뒤따라오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육신” “육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육신으로 생각하다.” 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으로 생각하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σαρκοξ살코기.” “육체.”이런 의미로 물질적인 상태를 가진 사람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사도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사망이라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이에 대비해서 영으로 생각하다.”라는 의미의 말을 사도는 말합니다.

το δε προνημα του πνευματοζ ξωη και ειρηνη

이 말의 의미도 간단합니다.

το δε προνημα του πνευματοζ라고 το δε προνημα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생각하다, 판단하다, 의견을 가지다, 라는 의미의 단어인 반면 του πνευματοζ” “육체의 의미와 대비하여 영으로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셨습니까?

육체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고, 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였는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이해하셨다면 저는 물을 것입니다.

영으로 생각한다는 것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을 말합니까?

이 헬라 단어를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과연 신학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에게 말씀해보세요.

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밝혀 보십시오.

사도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라고 말한 것의 의미는 이 썩어질 육체가 생각하는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무엇입니까?

헬라어의 단어의 의미는 지성의 지식 작용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죄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사도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영의 인도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으로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바로 이점을 잘 파악해 보라고 권면 드립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우리의 영혼의 일부는 믿음을 드러내고 일부는 하나님의 선을 드러내는 두 존재를 구별하여 말하는 것 같이 이 지식 앞에 우리의 존재의 정체성을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도 이것을 명확하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다. 로마서 7:21, 유명한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내 속에 두 체계가 있어 서로 나를 주관하려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지체 속에 있는 두 법 즉,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사람의 마음에서 서로 주도권 싸움을 하지만 육신에 있는 사람은 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굴복당하는 것을 괴로워한다고 말하면서 사도는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악과 선,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이것이 로마서 8장에서는 육신과 영으로 표현되고 육은 죄에 속하고 영은 하나님의 선에 속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이는 육신을 육체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조명을 받지 못한 타락한 사람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육신의 사람으로서 왜곡된 지식으로의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말합니다. 이는 로마서보다 최소한 6개월 이상은 앞선 서신으로 에베소에서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이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이라는 점에서 로마서신 보다 희브리적입니다. 이를 로마서에서 육체와 성령으로 표현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육체는 영혼을 배제한 단순히 육체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전인을 의미한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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