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사도는 이방인인 로마인들에게 믿음으로 들어간 그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유지하는 동안에 나타나는 삶에 대한 비밀스런 양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로마인들이 하나님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해한다면 사도가 무슨 의미로 인내가 연단을 가져오고 연단이 소망을 낳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사도가 말하는 의미들을 이해했다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아니 결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은 이방인이며 유대인과 다른 신분이라는 사실을 잘알고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하나님과 율법은 자기들과 관계가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충분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이 섬기는 하나님을 그들도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지로 유대인의 사상이나 성경(구약)으로 볼때 자신들은 철저히 버림을 받았으며, 이스라엘과 구별되었기 때문에 신분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으며 종교적으로 히브리인들에 대하여 열등의식과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외인이라는 명백한 사실앞에 매우 모멸감을 가질 수도 있을정도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히브리인들은 선택을 받았다는 자부심으로인한 종교적인 우월감을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속국으로 만들고 지배하였으나 하나님과 관계에서 유대인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유대인들이 선민 의식을 조금도 양보하지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속한 이방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의 정체성과 오늘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사도의 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교회에 속한 로마인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일까요?
또한 그들은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그들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상당수는 이미 히브리인들과의 상업적으로 혹은 노예나 혹은 어떤 단체와 사회에 속한 소속에서 부득이한 환경적 조건에 의해 교제가 있었던 사람으로 볼 수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대에 파병되었던 로마군인들중 다수일 것입니다. 이들은 25년간 군 복무를 마치면 재대를 하고 재대와 동시에 Diploma 와 함께 일정한 땅과 보상금을 하사받았는데 이들 가운데 유대에서 복무중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이 상당수 이거나, 혹은 유대인들과 교제하면서 유대인의 신앙에 감동을 받아 개종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유다에서 근무하는 동안 예수를 보았거나 혹은 수많은 이야기를들음으로 그들의 마음에 복음이 심겨지는 역사로 인하여 로마로 돌아가서 자연스럽게 크리스찬의 그릅에 동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감동은 사람의 신분의 고하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감동이 될만한 예수그리스도와 직 간접적인 만남, 혹은 현장에서의 접촉으로 인하여 감동이 되었다면 성령께서 그의 영혼을 감도시키는 역할로 복음이 심겨졌을 것이고 결국은 교회와의 관계를 벗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에 복음이 심겨진다는 것은 곧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인데 한번 복음의 비췸으로 거듭난 새생명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에 의해 버리심이 아니시고는 그 영혼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어떤 과정으로든지 유대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함으로 영혼에 복음이 심겨진 사람들은 교회를 결코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에 의해 로마에는 교회가 세워지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상당수가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가입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경험을 외면하거나 모른체 한다는 것은 억지로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것인데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었던 교회시대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성령의 역사를 거절한다는 것을 전혀 인정 할 수 없습니다.
매우 어려운 일들일 것이지만 유대에 근무한 모든 군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부딪친 사람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들, 예를 들면 십자가에 못밖았던 로마 군병들이나 그 군병의 친구, 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놀라 궁금했던 군인들, 그들 중 상당수, 이들이 예수를 마음속에 두고 생각하고 있었다가 자연 스럽게 교회를 찾게 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상당수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아주 잘 기억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이 사건이 그들의 영혼에 심겨지고 그 심겨진 복음의 역할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될 수 밖에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은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있었으나 자기들의 지배적인 우위를 가진 정복자의 민족이라는 우월감이 결코 유대인들과 하나가 되게 할 수 없었지만, 이런 사건 외에 다양한 사건을 로마인들의 영혼에서 사건들을 조명하여 복음이 심겨지게 하고 그 복음의 지식으로 새로운 인식을 하게됨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 보면 그리스도인은 자연적인 본성을 따라 살던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거듭난 새 사람의 삶이라는 이중적인 삶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연적인 본성으로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고,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지식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에 의해 심겨진 복음의 삶은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삶 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섬기는 크리스챤은 누구든지 이런 이중적인 삶을 결코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영혼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얻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에 의한 자연적인 본성의 사람과, 직.간접적으로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영혼안에서 성령께서 조명하심으로 심겨진 복음의 지식이 함께 거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크리스챤은 누구든지 이런 이중적인 삶을 결코 벗지 못한 상태로 남은 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안에 무지와 결함으로 말미암은 거짓의 체계와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말미암은 복음의 진리 체계인 두 지식이 함께 있습니다. 크리스쳔안에 있는 이 두 지식은 결코 혼합되거나 유기적인 관계로 연합되어질 수 없습니다. 이 지식들은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생겨났지만 구조적인 점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거짓된 지식은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모든 체계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진리의 지식은 완전하고 오류가 없는 지식입니다. 이 두지식은 한 사람을 두가지의 양면을 가진 사람으로 드러나게합니다. 이편이 강하면 저편이 약화됨으로 어느 한편의 사람만 드러나 보이게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사고에서 뚜렸하게 드러나 보이고, 거듭남의 사고에서 명확하게 정의 되어진 의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한 사람의 영혼안에서 일어나는 두 지식의 대립으로부터 갈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하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께서 공생애 동안 복음을 전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실때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말씀에 대립하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던 원인이 자기들의 지식으로 진리의지식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식이 있는 니고데모의 방문을 통해서 말씀하신 거듭남의 신비를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것은 예수님의 지식과 니고데모의 지식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에 새겨짐으로 말씀에 의해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연인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질 수 없으므로 결코 하나님 나라와 합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새로운 영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듭나게하는 그 영은 자연의 본성으로 생성한 지식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들었을때 성령께서 그 복음을 조명하여 주심으로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서 복음에 대한 지식을 생성하여 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겨진 복음의 지식에 의한 새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예수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연적 본성의 지식과 복음은 물과 기름과 같아서 혼합되거나 서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사람안에서 사람으로 활동하게하는 두가지의 다른 지식이 있고 사람은 이지식에 따라 완전히 화합할 수 없는 분리된 두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사람이 한 집안에서 한 부모의 태로부터 한 혈통으로 태어났어도 그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는 것은 혈육이 아니라 영혼의 지성에 심겨진 지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바 "위로부터 오시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요3:31)"라고 했고,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아니 하거늘 하믈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너희가 어찌 믿겠느냐(요3:12)"라 말씀하심으로 땅에 속하여 땅의 일을 말하는 것과 하늘에 속하여 하늘의 일을 말하는 두 구별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적 사람으로 태어난 그 생명의 근원은 땅에 속하거나 혹은 하늘에 속하는데 그것은 육체의 근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태안에서 생성된 생명체에 어떤 생명의 본질이 결합되느냐에 따라 그 생명체의 근거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하자면 우리는 어머니의 태 안에서 생성된 생명체의 터에 아버지로 부터 나온 생명이 결합되어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처음 탄생이고 이 탄생은 참된 생명이 되기 위해 영을 받고 그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아무리 많은 생명체가 생성되어도 아버지로 부터 생명이 주어지지 않으면 어머니 태 안에 있는 생명체의 터는 생명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마는 것처럼, 사람이 생명체로 태어났으나 사라으로 살고 활동할 수 있는 영을 받지 않으면 그 사람은 참된 사람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생명체는 어머니의 태에서 생성된 생명의 터에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생명의 본질이 심겨져 결합되므로 생명체가 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처럼, 세상에 나온 사람의 생명체는 사람으로 활동하고 살게하는 또 다른 생명체의 한 요소가 외부에서 영혼의 지성에 담겨져 사람으로 살게 하는데, 그것이 지식이고 예수께서는 이 지식을 말씀이라고 하셨고, 이 말씀이 곧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6:63)
그런데 사람은 태어난 후 곧바로 받은 영이 있는데 그것은 부모와 사회 환경으로부터 세상의 지식을 받고 그 지식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삶을 일컬어 자연의 본성의 삶이라고 말하고, 이 자연의 본성의 삶은 하늘로부터 온 지식으로부터의 삶이 아니라 땅에서 비롯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진리가 아니고 이 지식에는 필연적으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왜곡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본질이 무지롸 결함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한 거짓입니다. 이 지식으로는 인생의 어떤 문제도 진리대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이 지식을 가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거짓된 지식을 생성하여 스스로 거짓된 삶에 치우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타락의 삶을 살게 되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참 목적을 버리고 정욕이 이끄는대로 살아갈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그 형상의 조명을 받아 살도록 하셨으나, 사람은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탁월한 존재를 바탕으로 결국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에게서 상실되었고 영혼의 지성에서비춰주는 진리에 대한 조명은 사라짐으로 생성하는 모든 지식이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는 왜곡되고 거짓된 지식을 가질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영혼에는 진리의 지식이 새롭게 심겨져야만 합니다.
진리가 심겨지지 않은한 사람은 영생하는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고 항상 거짓되고 왜곡된 타락의 지식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지식이 심겨지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짓된 자기지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진리를 진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지식이 심겨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난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거짓되고 왜곡된 자기지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왜곡시켜 이상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사람안에 있는 거짓된 지식은 자기에게 들어온 어떤 지식도 왜곡시켜 진리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진리로 이해하려면 자기안에 진리의 지식이 있어서 그 진리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영혼안에 있는 모든 지식은 완전히 타락하여 무지와 결함을 가진 거짓되 지식이기 때문에 진리를 거짓으로 이해하고 해석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거짓되고 왜곡된 지식의 사람에서 진리의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이 방법은 사람이 스스로 결코 하지 못하고 오직 성령께서 사람의 영혼에 오셔서 진리를 심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진리의 지식을 가지게 되고 진리로 삶을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진리의 토대는 오직 하나 복음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존재를 시작한 이후 어떤 지식이 그에게 들어가 그 사람을 살고 활동하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진리의 지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영혼의 지성에 심겨져 진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요11:11~12), 무지와 결함으로 말미암은 왜곡된 지식이 영혼의 지성에 가지고 그 지식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닌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하나님의 아들의 조건이 주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인 약속의 언약과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영혼의 지성에 담고 그 말씀으로 살면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아가도록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고 언약과 율법을 주셨음에도불구하고 그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이 반드시 세상에서 고난과 고통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같은 선택을 받지 못함으로 약속의 언약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적하신바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한 하나님의 관심밖의 존재들입니다.
이방인은 이 땅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비참이라는 결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나온 것입니다.
솔직이 태어나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막아 그 생명체됨을 제거하시지 않으시고 존재로 태어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이와 같이 비참이라는 운명적 결과에 처해지는 삶을 우리 스스로 바꾸지 못하는 버려진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의한 작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죄의 원인에 의해 정욕에 이끌림을 받아 하나님 아들들의 들끓은 정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실지 우리는 최초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태어났으나 혈육의 관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요!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선택을 입어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자연의 본성에 따라 살게 되고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멸시하게 되자 하나니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죄의 근원으로부터 태어난 이방인이랴 어떠하겠습니까?
죄를 범한 다윗은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미니가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혈통이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면서도 죄를 범한 자신이 모태에서 죄종에 태어났음을 고백하는데, 우리는 다윗과는 전혀 다른 이방인으로 태어났으면서 우리 자신을 죄중에 태어난 비참한 존재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죄의 정욕의 산물이라는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은 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증거를 신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증거를 신뢰하지 않고는 결코 우리를 영원한 비참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없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 안에 우리를 깨우쳐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부어주시려고 허락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받고 있는 이 말씀 우리의 생명체에 심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아들의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 이 아니고는 결코 사람의 영혼에 심겨지는 진리의 지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은 들을 때 그 복은을 조명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영혼은 진리의 지식을 가지게 되고 드디어 그 복음으로 말미암은 진리의 지식으로 눈을 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로운 눈을 열고 세상을 보게 됩니다.
이제 비로서 "인내와 연단"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가 말한바 우리에게 인내와 연단은 무엇때문에 필요한 것입니까?
인내가 가져오는 연단은 결과적으로 소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무엇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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