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인내는 연단을 (롬5:4)

생명있는 신앙 2016. 3. 7. 06:07

(이 글을 읽기 전에 인간론의 기본 개념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매우 어려운 내용입니다. 기본적으로 로마서의 1장부터 포스팅해 온 순서대로 읽으시거나, 최소한 카테고리에 육신대로 살면 에서 "지식" 부분의 4개포스팅을 읽으신 후 에야 이해가 가능한 내용입니다.)


오랫동안 로마서 포스팅을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인내와 연단, 그리고 소망이라는 주제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이 주제는 저의 지식 수준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주제로서 지적인 한계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저의 지성에는 이 주제를 이해하도록 조명해주거나 해석에 도움이 되는 정의된 개념이 그리스 로마적인 의미만 있었고, 성경적인 개념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벽에 부딪혀 결국은 로마서 설명을 계속하지 못하고 부득이 1년여 동안이나 지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지로 이 주제들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로마서 포스팅 연재를 중단할 수는 없고 포스팅을 통해서 얻은 성경적 개념의 유익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오랫동안 이해하려고 고민하고 궁구하는 동안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해 그리스 로마적 개념과는 완전히 구별된 개념들이 저의 지성에 조명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신 인내와 연단 그리고 소망에 관한 지식은 자연인의 상태에서 기본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지성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하심에 의한 지식 곧, 진리에 대해 무지한 타락한 사람의 지성에 성령께서 이 주제를 조명하여 주심으로 얻어진 인내와 연단 그리고 소망은 그리스 로마적과 전혀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신 지식을 히브리적(유대적이 아님)과 헬라적(로마 그리스를 포함)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 헬라적 의미에서 인내는  "휘포모내" 혹은 "마크로뒤미아" 는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동적입니다.

무엇인가 억압에 의한 가해와 핍박을 당하지만 자기 자신의 인격적인 공격으로 저항하지 않고 버티는 것입니다. 결국에 죽음에 이르는 한계에 도달하더라도 견디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히브리어에서의 인내는, 단어 그대로 언어는없고 복합어만 있는데  אֶ֖רֶךְ אַפַּ֣יִם (에렉 아파임/ 출 34:6, 느 9:17, 시편 103:8) 으로 말그대로 "천천히 화를 내다" "화내는 것을 지체하다." "노하기를 더디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문구가 주는 늬앙스는 자기의 의지를 완전히 꺾고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연단은 헬라어는 "퓌로" 불을 통과하다. 와 히브리어는 "욥28:1, 사 1:25 쟈카크", 씼는다, 거른다, 혹은 "차라프"  불로 녹이다, 제련하다. 입니다.  

소망도 역시 헬라어는 "엘피스" 이고, 히브리어에서는 "티크바", "세봐", "토헬레트"입니다.
단어의 의미로 볼때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의미는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기록하는 사도바울이 유대적인 개념이나 헬라적 개념에서 아무런 구별이 없이 이해함으로 이 단어들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자기만의 독자적인 의미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구별하는것은 매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 주제를 이해하는데 어렵게 접근하고 지적인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은 대부분의 성경적 개념은 일반 자연의 개념과 다르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성경적인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것이 기본적인데 인내와, 연단, 그리고 소망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혼돈을 일으켰습니다.
어떻게 거짓된 자연인의 본성에서 성령이 조명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사람에게도 어느정도 진리는 있다" 라는 주장을 부정하지 못하고, 자연인의 지성에서의 노력에 의한 이런 진리의 발전은 결국  성령께서 조명하신 것 같은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이도 사람은 노력으로 진리에 이를 수 있고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거나 모든 면에서 최초 완전한 사람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주장할 것입니다.  신앙을 접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만난 후 5대 강령의 중심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매료되어 감동되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탐구하는 중 곳곳에서 만나는 인간의 본성과 5대 강령의 중심 사상에서 충돌로 인하여 많은 고민을 하곤했습니다. 대부분의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절대 사역이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절대성을 증명 하려고 하기도 하는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의 정체성에대한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은 과연 선한 점이 있는가?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조금이라도 인간을 변화시킬 어떤 선한 본성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 나의 사고에는 인간에게는 어느정도 선한 것이 남아 있다고 보고, 정도가 희미할 지라도 선한 것이 신앙에 영향을 미칠 수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지 나 자신을 다시 살펴 보아야 했습니다. 
이런 딜레마에서 인간에게 드러나는 선의 징후들로 인내와, 연단, 소망등으로 이해하려는 경향들이 지배적이지 않은지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내는 일반 적으로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억압된 상황을 이겨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연단은 조건적으로 교습생에게 주어진 일정 기간동안의 훈련과 같은 외부의 어떤 영향력에 이끌려 고난을 당하거나 아니면 시련으로 인하여 더나은 자신의 상태로 바뀌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과정들을 견디는 것을 의미하며, 소망은 목표를 향하여 삶의 방향을 의지하며 기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인에게 얼마든지 부여되어 있는 성품이고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타락한 인간에게도 상당한 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전적 타락"의 주장은 부분적 타락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정도의 선은 더 넓고 깊은 선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내와 연단과 소망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알려고 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 영혼의 지성에 위 주제에 대한 의미들을 질서대로 새겨두고 시시때대로 필요할 때마다 그 지식들을 꺼내어 삶에 적용하고 산다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자기 영혼의 지성에 새겨진 지식의 종류와 가치, 지식이 의미하는 내용대로 삶을 살기 때문에 진리의 가치를 가진 지식으로 산다면 그의 삶은 진리의 삶이 되고, 거짓의 가치를 가진 지식으로 산다면 그 삶은 거짓된 삶이라고 판단을 받게 됩니다. 사람의 영혼에 있는 지식이 진리인 사람이 거짓의 삶을살 수 없고, 거짓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진리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에서 말한바와 같이 인내가 어떤 상황을 이겨나아가는 것, 연단은 시련을 이기고 견디어 내는 과정, 소망은 미래에 도달한 목표라는 단순한 지식은 진리의 지식인지 아니면 거짓된 지식인지 어떻게 알 수있습니까?

고민하는 것은 보편적 진리가 진리인가? 에 대한 딜레마 입니다.
이런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전혀 다른 의미의 지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사람의 삶을 바꾸어주는 전환이 될 것입니다.
카멜레온이 다양 상황에 따라 자기의 색을 바꾸어 내는 것과 같이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 나타난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단순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또한 대부분 성경의 말씀들이 드러내는 의미들을 
공통적으로 함의하거나 혹은 자연적 감성에 의해 인식되도록 전달되는 보편적인 이해들을 진리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진리에 대하여 동경하는 '영적 지향성1'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영혼의 소망'이라고 합니다.

영혼의 소망은 지성안에 있는 소망이라는 지식이 전인에서 지각하여 인식되는 지적 활동성입니다.

사람의 구조상 영혼안에 있는 지식은 의지에서 작용하려고 하지만 의지는 자기의 터전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에 있는 지식을 전인의 활동으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의지가 자기의 터전을 갖는다는 것은 영혼과 육체가 결할 때 활동이 가능한 상태가 되는데 이 상태에서 영혼에 있는 지식이 영혼에서 지각된 후 의지에 반영되어 질때 비로소 할동이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이 육체안에서 개별적인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소망을 육체에 반영하여 사람이 행위하려는 의지가 되지 못하도록 영혼과 육체를 어두움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2 이로 인하여 영혼이 전인안에서 생성되어진 지식이 아닌 '독자적으로 가진 지식'들을 의지에 드러낼 수 없게 되었고, 육체와 영혼은 전인안에서 육체와 영혼의 개별적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한마디로 무질서한 혼란 상태가 되어버린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인내와 연단, 그리고 소망이라는 것이 과연 진리에서 비롯된 행위들일까요?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있는 지식에 대해서 언급을 함으로써 인내에 대한 언급했습니다.  

인내의 필요성은 이미 짐작을 했을 것이지만 자연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에게 자연의 본성의 지식과 복음의 지식이 있씁니다. 

자연의 본성의 지식은 잘 알 수 있는 대로 사람이 태어난후 자연의 환경에 의해 부모와 사회로부터 얻어진 모든 지식을 말하고, 복음의 지식은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으로부터 얻어진 지식입니다.

사람은 이 두지식중 어느 하나의 지식으로 의식하며 살아가지만, 이 두지식이 동일한 지식일지라도 서로 합하여 지거나 이해되는 지식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표현하는 언어와 의미가 같을 지라도 코드가 전혀 다릅니다. 사람의 영혼에서 지각할 수있는 지식을 가질때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것과 자기안에 있는 자기 지식의 조명으로 지식을 가지는 것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은 자연의 본성인 사람은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반드시 성령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개혁교회에서는 누구든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의 지성의 지각하고 이해함으로 우리가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두 가지의 지식을 가짐으로 그 어느 한편의 사람으로 의식하는 삶을 드러낼때, 어떤 지식의 삶을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모습과 불신앙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물론 그 드러내는 삶이 자신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신앙의 유무에 대해 인식할 수 있도록 판단되는 것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 만이 아시지만 진리의 지식으로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반응이라는 것을 인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있어서 인내와 연단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요구하시는 목표에 이르는 완성도에 따라 주어지는 환경에 따른 적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어느정도의 완성도에 이르는 사람이기를 기대하시고 지으셨습니다.
그 사람은 독립적으로 자기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객관적 관계를 가지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이 아닌 자기의 지성에서 생성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식에 비추어 오류가 없고 완전한 지식에서 반응하여 드러내는 의지의 표현을 말합니다.   

이 사람의 완성도는 육체의 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지성의 완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연인의 본성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무지와 결함을 함의한 지식이기 때문에 오류를 함의하고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어떤 지식도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객관적으로 소통을 하지 못합니다.

이는 가인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 되었습니다. 

가은 하나님을 여러번 만났고 하나님과 대화를 했으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인의 지성에는 진리의 지식이 조금도 없으므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자기의 지식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지식으로 이해할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자연인이 아니,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기 이전에,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이해한 것 같이 가인은 복음의 지식이 그 영혼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성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하나님을 본성 그대로 인식하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완전히 객관적인 상태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사람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4장에 보면 24장로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광과 찬양을 돌립니다.

그들은 온전히 자기의 의식과 자신의 지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사람이 온전히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관계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진리의 지식으로 가득채워지고 그 지식에 의해 사고하고 자기의 신앙을 드러내고 고백할 수 있는 상태에서 부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기 까지 성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상태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은 다양한 경험과 지적인 삶의 과정을 배워야만 할 것입니다. 수많은 다양한 삶속에서 사람은 점차 성장하여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삶 속에서 겪게 되는 무수히 많은 삶의 경험들이 인내와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뜻하신 존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와 연단 그리고 소망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없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더욱 온전히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현재 인내를 요구받는 삶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단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의 목표는 소망을 이루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과는 반대로 사람의 고난과 어려움, 고통, 그리고 환란을 통한 시련을 이겨 나아가는 어떤 상황으로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것은 사도가 말하는 의미와 전혀 배치되는 주장이 됩니다.




 


  1. 영혼의 지성이 추구하는 열망이라고 할수 있다. [본문으로]
  2. 창세기 6: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