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롬5:7)

생명있는 신앙 2017. 3. 10. 05:51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5:7)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의인을 위하여 죽으심이냐?
선한 사람을 위한 죽음인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람들 가운데에도 의인을 위하여 용감하게 자기를 희생시키는 사람들이 있고, 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죽는 자가 사람 가운데에 없다는 것입니다. 곧 죄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흉악한 범죄자를 위 죽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만인들이 죄를 범하여 증오하고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져 그 사람을 구원을 목적으로 자기 생명을 던졌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사도가 고린도인들에게 전하는 서신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
이 말의 의미는 죄인들을 위해 희생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은 이를 이해를 못하고,
예수를 마음으로 거절하고 복음을 외면하는 이방인들은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고전1:23)

죄인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신학을 우리의 지성에 단단히 뿌리를 박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그 골고다의 죽음과 우리의 구원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고, 이를 분명히 알게 하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3, 그 아들을 죄인들이 죽였습니다.
4, 죽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죄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람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수많은 생각들과 이론들이 있지만 그 질문들에 대헤서는 교제시간에 나누기로 하고,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는 다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시고, 삼위 하나님의 제 2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여기에는 아주 많은 신학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 깊은 의미들을 하나씩 배우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또 하나 메시아는 보내심 곧 내어주심을 받으시고 오셨습니다.

단순히 보내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를 내어주심이라고 표현하는데, 모든 처분을 맡기다라는 의미입니다.
곧 메시아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관할 하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신 성자 하나님을 죄인들에게 내어주시고 어떻게 대우하시든지 전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내어줍니까?
자주 말씀을 드렸으나 이제는 오늘 한 시간에 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도 이미 앞에서 많이 살펴보셨으니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의미를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소그릅으로 모일 때 각자 자기의 생각들을 내놓고 더 깊은 은혜의 시간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죄인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두 부류로 엄격히 구별하여 나눕니다.

구약에는 선민과 이방인으로,
신약에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서 나타난 약속의 아들들과 종의 아들들로 나눕니다.
이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이라고 명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먼저는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헬라인(이방인)을 의미합니다.(2:9)
여기에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신 구원의 대상, 곧 약속을 주신 사람들이 누구인가?
구약성경은 약속의 백성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실 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4:22)
그러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고 이방인에게 다시내어주고말았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예수, 곧 메시아가 의미하고 있는 의미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인에게 내어주는 어리석고 미련한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이 의미도 몇 날, 몇일을 은혜롭게 이야기를 나누어도 다 못하는 내용들입니다.
이제 비로써 예수 죽음에 관한 의미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은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을 넘겨받았습니다.
이방인하나님의 아들
우리는 이 의미심장한 사람에 대한 구별,
곧 성경이 말하는 다른 표현인 사람에 대한 의미로서 구별을 접하게 됩니다.
복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들은(1:11~12)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듣게 됩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이지요?
이방인의 정체성입니다.
누구라도 이 정체성에 관한 설명을 들을 때 구원의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의미도 이 자리에서 다 말씀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압니다.

이를 위한 소그릅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곳에 가셔서 이야기들을 나누고, 은혜를 누리시면 됩니다.

가실 때에는 반드시 손수건을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복음의 마지막 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을 넘겨받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들끓는 증오감과 분노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을 죽입니다.
아주 처절하게 피를 말려 죽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시고, 이방인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다.”
저는 지금 이 말씀을 여러분의 영혼에 선포합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여러분의 영혼의 지성에 박혀지도록 강렬히 소원하는 마음으로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이 한 문장을 여러분의 영혼에 철필로 새겨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 안에서 고민이 되고, 이 말씀인 여러분을 괴롭혀 여러분이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기를 자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
무엇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내어주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지성은 이를 알려고 몸부림을 치는 고뇌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알고자 하는 그 비밀을 밝히 조명하여, 여러분이 능히 이해하도록 하시기를 저는 기도하겠습니다.
궁극적으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는지?
그리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지?
그 고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몸부림을 치시고 답을 찾아 고민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저는 강렬하게 소원합니다.
그 답이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선인을 위하여 죽은 사람들이 혹 있거니와,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2:18)” 라고 말했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창세전에 보내시기로 이미 약속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이 이방인인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아는 것은 복음의 핵심을 만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오늘 이 문제에 관하여 아주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들은 소그릅으로 모여 교제를 할 때 다시 각자의 느낌을 발표하심으로 주님의 은혜를 만끽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만물을 선하게 지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입니다.
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명확하게 기억하시도록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선이란?
질서로움조화로움입니다.
이를 가장 쉬운 말로 표현하자만 순서에 입각하고 서로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심 만물이 이처럼 하나님의 선에 합당하여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1:31)
그런데 지음을 받은 만물 중 사람이 하나님의 선으로부터 이탈하고 말았습니다.(에스겔 28:15)
처음에는 하나님의 선에 잘 적용되었었는데 살면서 이탈한 것입니다.
자기 위치에 잘 어울리도록 있었는데,
자기 위치에 있지 않고 엉뚱한데 있어서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자기 스스로 그렇게 되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여러분의 집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는데, 어떤 한 가지가 제자리를 찾을 수도 없고 여러분의 집에 전혀 어울리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버리지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들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피조세계에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잘 어울렸으나,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의지를 발휘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질서를 깨뜨린 것입니다.
우리는 사정없이 그 피조물을 버렸을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너를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방법이 무엇인가?
버림을 받아야 할 사람이 살려면 자기 자신을 죽이고 다시 살아서 본래 지음을 받을 때 부여된 그 자리에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야 되고 하나님의 피조세계에서 해악의 존재이기 때문에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죽음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 죽어주시고 그것을 믿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삼으셔서 피조세계의 본래의 자리에 이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보냄을 받으셨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스스로 죽으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을 이탈한 죄인들인 우리는 죄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죽음을 만나고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다르게 순전히 스스로 죽음에 빠져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을 해방시켜 본래 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강렬하게 원하셨습니다.
이를 창조를 설계하실 때부터 이미 아셨고,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는 것이고 어떻게 죽으셔야 하는 것까지 면밀하게 파악하셔서 완전하게 계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서 지음을 받은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결코 버릴 수 없습니다.
제거되거나 무시할 수 있는 그런 위치가 아닙니다.
사람의 역할은 하나님의 창조를 더욱 빛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할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지하도록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존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지적으로 소통이 가능하도록 설계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인하여 얻는 만족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피조물과 창조자 사이에서 좁힐 수 없는 물리적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에게서 발산되는 인격적 환영에 이르게 합니다. 사랑은 서로 다른 마음의 연합으로 인한 격정적인 충만의 감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신다는 것은, 첫 번째로 창조의 목적에 따른 높은 완성도에 있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계획의 탁월하심에 대하여 만족하심에 있었던 것으로 이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중에 사람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셨고 마음이 흘리셨을 어떤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사람을 사랑하시되 자기의 독생자 아들을 내어주시기 까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안에 있는 유일한 독생자를 내어주시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뜻에는 그것으로 인한 더 큰 목적을 이루시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된 사람이 기쁘고 희생된 자신이 더 기쁜 결과를 기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드러내는 하나님께 대한 더 큰 만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만족의 느낌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 충만하신 만족감은 창조주와 피조물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마음을 느낀다면 아마도 존재 한다는 것이 무리일 것입니다.
다만 제한된 감정을 사람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의 감정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자신이신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것을 기뻐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영혼의 수고를 만족하셨던 것입니다.
아주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만족을 위해 자기의 영혼이 수고하시는 것을 결코 후회하시지 않으시고 만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시고, 영혼의 수고를 당하시는 그 의미들을 이해할 수 있고,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얻은 유익에 대해서 말하므로 슬픔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신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맡기실 때 단순히 내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사람의 영혼의 만족을 위해 주셨고 그 한계는 일부 제한된 조건을 적시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내어주신 것입니다.
아들 안에 있는 생명까지도 죽음에 이르는데 제한적으로 허락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사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주심으로 조롱과 비난과 조소와 온갖 괴로움을 당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심은 타락한 사람에게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켜주시는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의 욕구는 먼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강한 불만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영혼의 깊은 지성의 내면에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전 삶에 드리워진 불안과 갈등, 그리고 삶 이후에 처해진 지옥으로의 비참에 대한 강렬한 불만입니다.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는 존재를 시작하면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이 죄로 말미암은 결과적 존재라는 영혼의 지각인데 그 내용은 무지입니다.
영혼의 지성에는 아무런 지식이 없습니다.
지식이 없으니 지각을 할 수 없습니다.
영혼은 지적기능의 기관에서 감정을 담당하는 기관에 아무것도 지각에 반영하지 않으므로 영혼이 느끼는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에 빠져듭니다.
이 상태는 역시 전인에서 느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지성에 지각에 반영한 것이 없고, 지각은 반영 받은 상태가 아니므로 아무것도 전인에 반영할 수 없으므로 지각 자체만으로 깊은 두려움에 빠져들뿐 사람의 전인으로 느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지각은 전인, 곧 마음에 반영되지 않은 영혼의 지성에만 있는 지각입니다.
이것은 대지를 가르고 분출하는 화산과 같은 것입니다.
화산을 보십시오.

평상시 외면에서는 그것들이 감추어져 있어서 고요하지만 기회를 만나면 솟구쳐 올라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불을 뿜어내며 솟구치는 분출하는 용암은 모든 대지를 녹여버리고 태워버립니다.
그것에 접촉한 생명체들은 태워지고 생명을 잃게 됩니다.
사람의 영혼 안에 숨겨진 지각된 이 무지의 정체는 다름이 아닌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으로 곧,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무 지식 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부여된 감각을 가지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감각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닮은 존재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심과 같이, 사람도 자기의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 정체성이 전인으로서 마음에 인식되는 것과, 영혼의 감성으로 지각되는 것은 구별됩니다.
전인의 마음에 인식되려면 반드시 지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감성에 지각되는 무지는 지식이 없는 상태에 대한 지각인 것입니다.

이 지각이 대지의 표면에 감추어져 있는 용암과 같은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 무지의 지각이 영혼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요동치를 상태에 따라 솟구치는데, 자신의 존재 근원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 반응은 분노와 미움, 혐오, 증오 등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증오를 품고 있습니다.
그 증오를 자신을 존재하게 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분노로 표출합니다.
하지만 이 분노가 지식에 근거하지 않고 무지에 근거하기 때문에 전인에 반영하지 않으면서도 전인으로 솟구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한 어떤 조건들과 유기적인 결합을 가지고 드러내는 반응인데 미움, 증오, 분노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아무런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완강히 거절할 뿐만 아니라 증오와 분노를 드러내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나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은 매우 분노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에 대해서 매우 싫어하는 반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
자신을 만들고, 죄의 결과물로 태어나도록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영원한 비참에 처해지는 비극적인 존재가 되도록 한 장본인에 대한 분노와 미움의 표현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매우 거절감과 미움을 표출합니다.
영원한 비참에 처해지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무지한 현실의 삶에 살도록 태어나게 한 하나님의 아들의 범죄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영혼의 감성의 드러내는 반응인 것입니다.
이 반응이 무질서하고 폭발적이며, 분노하는 마음으로서 미움으로 전인의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드러내는 미움과 증오, 분노는 실지로 그 본질이 모두 자신을 존재하게 한 하나님의 아들의 범죄로 말미암은 결과라는 것과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반응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매우 증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이시며, 독생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시고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존재하게 한 하나님의 아들의 범죄와 이를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소유한 존재이기 때문에 죽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죄가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죄,
모든 세상을 타락으로 오염시키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선을 분열시킨 죄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죄는 하나님께서 대신 죽여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 죄는 죄의 열매인 사람이 직접 죽이는 것으로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들에게 내어주시는 것은 곧 하나님 아들 안에 있는 죄를 죽이도록 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존재하게 한 그 죄의 근원을 죽임으로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죄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직접 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7)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우리가 아닌 로마사람이 유대인의 거절로 인하여 내어줌을 당하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죽임을 당하였다고 받았습니다.
2천년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 졌다는 공식같은 방법으로 지식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의 지식은 성경과 성령께서 증언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2천년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개개인이 지금이라도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분을 드러내 죽였다고 믿게 하는 성령의 감화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너희가 못 박은 예수다.”라고 명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인자입니다.
예수를 죽인 살인자!
여러분이 예수를 죽였고, 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분노와 증오를 쏟아냈고, 예수는 우리의 증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물이고, 죄에 속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시고 그를 죽이게 하신 후, 우리의 분노를 이용하여 죄를 죽이는 결과를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는 죽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으로 우리를 존재하게 한 죄가 죽었고, 죄가 죽음으로 우리가 같이 죽었습니다.(2:20)
본질상 우리는 죄였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때 그가 죽음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죽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죽인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살리셨고, 죄에서 죽은 우리를 그 아들 안에서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죄인입니다.

여러분이 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려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그 안에 있는 죄를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주 말합니다.
예수는 내가 죽인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죄를 죽이지 않고 거듭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본질에서 떠난 형식적으로 흘러버립니다.
예수를 죽이지 않은 여러분은 결코 거듭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는 것은 곧 우리에게 그를 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