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3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다윗의 삶은 모든 사람이 높이고 칭송하는 것과 같이 화려하고 안락하며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는 막내로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지도 못하고, 아버지와 형들로부터 소외를 받았고,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도 순탄하게 왕이 되지 못하였으며, 전왕 사울의 시기로 죽을 고비와 도망자의 운명에서 수없이 험난한 운명의 순간을 모질게 이겨 가야만 했습니다.
천신 만고 끝에 왕이 된 이후에 얼마 못가서 아들들의 반란을 맞아 도망 다녀야 하는 뼈아픈 고통의 순간을 보내야 했으며, 자식들 간의 강간 사건으로 인한 원한과 복수극과 권력쟁투를 보아야 하는 슬픈 인생을 겪었습니다.
누구보다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 복 있는 사람이라는 칭호는 결코 어울리지 않은 수식어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3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도망가면서 읊은 노래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배우기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사상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난 창작이나 작품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여기에서 성경은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이성경을 읽을 때 감동을 받은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보시나요?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말이 무엇입니다.
"hovering” 떨림(운행)을 말합니다.
이 떨림은 성령의 감동이기 때문에 질서롭고 조화롭게 떨립니다.
그냥 의미 없이 떨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질서롭고 조화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모든 일이 질서와 조화에 적합하지 않고 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은 반드시 질서롭고 조화로움이 드러나고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 지각 되어집니다.
질서롭고 조화로움에 마음에 적용되면 평온하면서 무한한 기쁨이 솟구쳐 오릅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런 경험을 합니다.
대부분 처음 거듭나거나 진리를 깨달음으로 흥분될 때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된 성경은 우리의 타락된 본성으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은 성경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성경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이런 노래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아니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되 단순히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수준이 신앙인에게 이런 감동의 노래가 나올 수 없습니다.
최소한 모세오경을 습독하여 그들의 지성에서 활발하게 적용되어 삶의 실천으로 옮겨진 사람에게나 가능한 노래입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가 모세오경이 적용되어 나온 노래라면 단어 하나하나에 성령이 감동 되었고, 그 노래이 전체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의지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노래가 사람의 삶의 환경과 함께 어우러져 있으니 실제적인 현장에서 느끼는 노래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노래는 단순히 사람이 자기의 감동을 노래하지만 성령은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의식을 사용하여 당신의 감동을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편의 내용을 잘 살펴보십시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동안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성을 피하여 도망하면서 읊은 시입니다.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의 침상까지 더럽히고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뒤를 쫓아갔습니다.
이때 다윗은 지난날 동안 자기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기억했습니다.
어렸을 적에 형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어려움. 왕이었던 사울, 블레셋의 아기스, 등등의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시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다윗이 안전하게 거할 땅이 없는 상태로 젊음을 다 보냈습니다.
예수께서도 태어나자마자 헤롯왕의 시기로 죽임을 당할 뻔했고, 애굽을 피신한 후 나사렛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으나 천대를 받았으며, 바리세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노리는 위협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으면서, 위기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었습니다.
마침내 가장 아끼는 12제자중의 하나인 가롯 유다로부터 은 30세겔에 팔려 모진 고문과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여 죽으시고 말았습니다.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만도소이다.
한번 보세요.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성에서 내어 쫓기고 아내들까지 짖 밟힌 처절한 고통 속에서 어느 누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라도 모진 고난을 당하거나 불행한 상태에 처해 있으면 “저의 하나님이 저를 보호해 주지 않은가 보다.” 라고 숙덕거리는 말들을 하게 마련입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불행을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저주로 여기는 우리의 무지한 판단이 우리를 죄를 범하게 합니다.
아벨의 죽음, 선지자들의 핍박과 고난, 선한 사람들에게 임한 환난은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을 핍박하는 사람의 죄의 모습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 때문에 세상이 그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랑받은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시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하나님의 아들들의 시련과 고난, 영혼의 울부짖는 호소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상이 평온하게 살도록 놔두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내가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 도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신자들은 고난을 당할수록 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더 의뢰하게 됩니다.
또다른 하나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개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아담과 아브라함에게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약속의 아들로 구별되어 이세상에 오게 하셨습니다.
가인가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은 별도로 태어나게 하셨으나 이삭에게서는 한태에서 동시에 다른 아들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은 아들 야곱, 택합을 받지 못한 아들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씨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롬9:7)
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삭의 씨가 다 이삭의 씨가 아니라 약속으로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라고 다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지만 에서와 같은 후손이 있어서 이스라엘안에서 약속의 자와 정욕의 아들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니다.
이것은 그들의 행위와 삶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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