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 새벽기도

새벽기도4-시편4편

생명있는 신앙 2017. 6. 15. 04:05


시편4

 

이 시는 어떤 환경에서 부르는 노래인지 의견이 분부합니다.

많은 주석들이 있고, 이를 해석하는 다양한 서적들도 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는 이 노래는 찬송의 송영이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첫번째 단락의 노래는 기도하겠사오니 들어 주소서라고 호소하고, 곧 이어 기자가 느끼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독백의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홀로 있을 때 깊은 묵상에 빠지게 되면, 그 묵상 중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의 말을 혼잣말도 두 사람의 입장을 말할 때가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바로 이런 상황에 빠져 자기의 입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느냐?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자를 택하신 줄을 너희가 알지어다.”

이 독백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고백으로 보입니다.
이런 말이지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나는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즉시 돌아서서 세상을 향하여,
사람들아 제발 헛된 것을 추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하여 신실한 자들을 택하신다.”

2절에서부터 5절까지의 말씀은 곧 미래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을 향하여 선포하시는 것 같습니다.
실지로 성경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에 먼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말씀하실 때 도 동일한 의미를 반드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기자가 성경을 많이 읽고 알도록 영혼의 지성에 새겨져 있을 경우만 시편을 노래할 수 있으므로 이 시편도 영혼에 있는 성경으로부터 노래되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모두가 하나의 사상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생각 또는 대부분의 복음서에서 시편과 같은 느낌을 갖는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읽은 시편도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노래로 들을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신다고 읽으시면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의로운 자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수 없습니다.

머지않아 제가 자주 말씀을 드리는 죄에 관하여 설명을 드릴 것입니다만, 그동안 우리의 죄가 얼마나 우리를 옥죄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했는지 폭넓게 살펴 볼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더라고 죄를 설명 드리는 그날에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를 얼마나 혐오하게 될지 예상이 됩니다.

죄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죄는 여러분을 얽매지 않습니다.

죄가 여러분의 인생을 별도로 억압하거나 드러나게 괴롭히지 않습니다.

죄는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본질을 알게 되면 여러분 자신을 향하여 치를 떨게 될 것입니다.
란 다윗의 행위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명칭 아래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죄인은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롭게 해주시는 은혜로운 판단 외에는 그 어떤 방법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칭의입니다.

아브라함의 의를 보십시오.

창세기 15: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죄를 결핍으로 봅니다.
이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데 죄가 있기 때문에 의에 이르는 기준에 모자라다고 봅니다.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의롭게 됩니다.
그래서 공로를 강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교에서의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한 사람도 율법을 온전히 지킨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을 의롭다고 하신 것 처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불러주신 사람만 의로운 것입니다.

죄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면 의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7에서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고라고 시편 32:1절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아쉽게도 유대인들은 자기를 의롭다하고 모든 이방인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을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의를 행할 자격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도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여 준 자만을 의롭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의는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아브람에게 칭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는 율법보다 먼저이고,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2:16)

이것을 신학에서는 칭의라고하고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칭의라는 말은 의롭다고 칭하여 준다는 의미입니다.

곧 죄는 여전히 있고 불의한 사람이며, 죄를 행할 수밖에 없는 타락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여 준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편기자가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는 의미를 살펴보십시오.

나의 행위나 옳음이 아니나 의롭다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이곳에 이렇게 임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고통 중에서 저를 자유롭게 하옵소서

다윗에게 어떤 고통이 있을 까요?

무수히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사울을 피하여 도망다니는 고통, 자식들이 서로 싸우고 강간하고 복수하는 고통, 자식에게 반역을 당하여 왕위를 물려나게 되는 처지에 이르는 고통, 밧세바를 범하고 죄로 말미암아 심경이 괴로운 고통, 크고 작은 사건들이 복 받은 자의 삶 위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아픔은 다윗만이 아닙니다.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아픔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은 다윗과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무수히 많은 문제들의 연속에서 하나의 완성된 인생을 장식하는 것인데 드라마와 같은 순간순간들이 인생을 엮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를 부르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의 뜻대로 보호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 부르짖는 호소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기도가 영혼의 제사라고 한다면,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이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제물을 잘 준비해서 정성껏 잘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풍성하고 많은 예물을 드려 넉넉하게 하는 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상항 심령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진심으로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있는 제사를 원하십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구원을 호소할 수 있으나, 복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인생에 문제가 있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찢어지는 아픔을 스스로 해소하는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시편기자가 혼잣말로 독백을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을 통하여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아!
언제까지 내 영광을 수치스럽게 하며 헛된 것을 좋아하고 거짓을 찾으려느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에게서는 진리가 없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지식은 본질상 왜곡된 타락한 지식이기 때문에 아무리 궁구해도 진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짓만 나올 뿐입니다.

요한복음 8:44에서 사도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낳으니 너희 아비의 일을 행하는 도다, 처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 그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 마다 제것으로 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앞에서 진리를 외칠 때 진리를 귀로 듣고도 진리의 삶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면 사람의 영혼에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본래 거짓의 그릇에 진리를 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릇이야 어차피 부은대로 받겠으나 그 안에 있는 거짓지식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겠습니까?
너무도 명백한 진리입니다.

진리에 거짓을 곱하면 거짓이 됩니다.
맑은 물에 흙탕물을 혼합하면 흙탕물이 되지 물이 맑아지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본래 죄인으로 태어낫기 때문에 죄인 흙탕물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에 진리를 붙는다고 맑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새로 심는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의 영혼에 진리의 씨앗을 뿌려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인데 이 씨앗이 복음이고, 복음으로부터 사람이 새롭게 성장하여 거짓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진리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지라도 사람은 아직 거짓과 진리로 함께 살아가게 되고 자기 안에 있는 두 마음으로 인하여, 갈등하며 살다가 마침내 복음으로 천국에 이르고, 거짓으로 지옥에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이는 내가 너희를 영화롭게 지었는데 언제까지 거짓으로 살아갈 것인가?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영화롭게 지으신 것처럼 사람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영광을 변하여 거짓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에 복음이 심겨지고 그 복음이 진리의 지식을 통하여 성장하셔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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