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5편
심사를 통촉하소서
심사라는 말이 (하기그) 곳 “중얼 거림, 탄식”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의 중심에서 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는 말만 늘어놓고 중얼거리는 태도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쏟아내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무엘상 1:10에 보면 한나가 마음을 괴로워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통곡하며, 라고 말하는데 아들을 얻지 못한 슬픔을 애통해하는 이런 기도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도 어떤 목적을 향하여 마음을 찢는 기도를 드린 적이 언제 있었는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의 매일 이런 가슴 아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보실 때 당신이 지은 사람을 보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처해지는 미래의 삶을 아시고, 그 고통의 깊이를 아셨기 때문에 마음을 찢으시는 아픔을 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앞에 다가오는 사람들의 아픔과 인생의 문제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며(마9:36) 마음을 아파했습니다.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주님 앞에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사실 부르짖는 형극을 하고 있는 영혼의 갈구를 보신 것입니다.
구원을 향한 저 사람들의 몸부림은 사실 사경을 해매는 영혼과도 같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면서 하나님을 왕으로 높이고 자신을 친히 그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세상사람 들에게서 볼 수 있는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책임자의 위치에 서도 마치 자기가 왕인 양 우쭐대고 오만한 폼을 가지지만,다윗은 한나라의 왕이면서 자신을 낮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왕위는 그다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 양을 치던 자의 마음으로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전적인 신뢰를 통한 자신의 무능력과 비천한 인생을 바라본 진리에 기반한 자기 통찰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사람의 가장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를 때 마음의 진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마치 기뻐날 뛰는 듯한 표현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다윗은 아침에 기도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노래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아침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침을 깨우고 소홀히 보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모세오경을 읽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그렇습니다.
지금 그들의 기도는 마음을 찢는 깊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둘러싼 적들과, 하나님의 성전 터를 빼앗기고 성전을 잃어버렸으며, 다시 세워야 한다는 간절함이 그들로 하여금 간절히 부르짖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참으로 행복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보호함을 같이 누리는 민족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들이 부르짖는 마음으로 민족과 나라를 위해 자신을 일깨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보면 정말로 부럽다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침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날들을 밤 동안 기도하고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우리를 이 아침마다 깨워 기도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게 하신 어떤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뜻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심입니다.
다윗은 이어서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미래에 속한 저 천국에서의 있을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확하게 현재, 지금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닙니다.
악은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함께하시는 그날에 제자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시작 하지시 않고 갈릴리에서 시작하신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갈릴리는 로마의 정권에 아부하고 지명을 받아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이 된 진실과 거리가 먼 부도덕하고 명예와 권력의 욕심에 빠져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아니라 겸손하고 하나님을 잘 아는 신실한 사람들이 배척당하여 쫏겨난 대부분 진실한 사람들이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부할 줄을 모르고 정의를 잘 알기 때문에 불의와 함께 할 수 없어서 도망치듯 권력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난을 천직으로 여기고 죄를 이스라엘의 죄를 안타가워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부름을 받은 대부분의 제자들은 성경을 읽고 진실함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아는 제자들이었으나, 가난한 삶의 여건으로 보다 더 많이 배우지 못하고 아첨과 아부를 일삼는 권력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의 제자가 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엇습니다.
이 구절은 마치 예수께서 오셨을 때 함께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죄악보다는 가난한 삶을 해쳐 가는데 급급하여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더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택하시지 않고 갈릴리 지역을 택하여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주와 함께 거하였던 12제자들을 보십시오.
그중에 한 사람은 아브람과 사래가 이스마엘을 낳을 때처럼, 인간의 꾀를 내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었던 가롯 유다를 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왜곡된 열정으로 새로운 세상을 기대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꾀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 앞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볼 수 있었어야 하는데, 소경이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심기워진 증오와 분노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의롭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행악자들과 한패거리였고, 주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꿈을 이우러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멸망사를 보면, 유대를 로마로부터 독립해야 겠다는 충성심에 빠진 유다라는 한 젊은이가 지나친 열심히 예루살렘에 들어와 멸망에 이르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꾸어 놓은 세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분노와 증오에 휩싸인 그의 영혼은 세사에 던져준 평화의 나라를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 어떤 지식들을 심었느냐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고 모범을 삼아 그처럼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만족하는 그런 일을 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의식을 가지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 우리에게 드러나도록 기대하는 목표를 가지고 우리의 공동체를 세워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실질적인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면서 작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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