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아주 다양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의를 "칭의"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교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일까? 라는 생각에 젖어 고민하였습니다.
사도가 로마인에게 보내는 서신을 읽는중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깊은 사색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문뜩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관점이 포착되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로마서1: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는 의미를 이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각기 자기들의 생각대로 의미를 설명한 것일까요?
물론 설교자가 같은 의미의 지식을 지성에 가지고 있었다면 아주 쉽게 본문을 해석하고 이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자신안에 새겨진 복음의 역할로 인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는 본래 지식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사고에서나 아니면, 백과 사전같은 자료집에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요?
구약 성경에는 그 자료가 있나요?
레위기 4장1절 5:13절에 속죄제로 아주 잘 나타납니다.
속죄는 : 말 그대로 죄를 속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사람이 죄를 속하려 사함을 받으려면 제물을 가져오고, 대제사장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죄를 제물에 전가하는 안수를 하고, 칼로 그 제물의 각을 뜬 다음 피를 받아서 제단에 뿌려 제사를 드리는 의식입니다.
제물은 바치는 사람을 대신해서 자기 몸에 죄를 받고 제사장의 제의 의식에 따라 피를 흘리고 각이 떠지고 죽어 피는 재단에 뿌려지고 온몸은 갈기갈기 찢어진 다음 태워집니다.
이것을 의를 이루기 위해 행해지는 속죄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자기 때가 되시는 것을 알리시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때가 되면 친히 부르시고 택한 제자들이 실망하고 흩어져 버릴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사도 요한은 이를 마음속에 담아두었든지 아니면 나중에 생각이 났든지, 그 말씀을 복음서에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때가 될때 일어날 놀라운 일에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이 실족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성령을 보내셔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가시고 모든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면 아무도 제자의 상태로 남아 있을수 없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을 말씀하셨는데 그 일은 곧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라고 하신 반면, 의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셨으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고, 심판은 이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모두 결과적입니다. 특히 의에 대해서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의미심장하고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것은 성령께서 가르치실 주된 내용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는 곧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롭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셨다는 것은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시는 것이고, 성령께서는 예수와 같이 우리도 의롭게 되도록 가르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아무도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해석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고 했습니다.
실지로 사도 요한이 기록한 예수님의 말씀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는데, 바울의 말이 우리를 편안하게 했습니다.
다시말하자면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고 이것이 의의 조건입니다. 이제 율법의 요구를 예수께서 이루셨으므로 다시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이루신 율법의 요구에 대한 성취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말미암고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는데" 예수께서 이를 이루셨으므로 우리가 예수를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요,
예수는 의를 이루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본래 죄인이 아니었으나 죄인으로 보냄을 받으셨고,
죄인으로 세상을 사시고 마침내 율법의 요구를 모두 성취하시고 죽으심으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마침이 된다는 것은 죽음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어여 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는 죽이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의가 아닙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얻으시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는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의를 복음과 연과지어 설명했습니다.
로마서 1:2에서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1장16절에서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처음부터 왜곡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영혼에는 많은 지식들이 저장되어 있고, 이 지식들의 유기적 연산으로 외부의 상황에 반응하여 행동 될 지식을 산출합니다.
이렇게 산출된 지식이 행동으로 나타나고, 이 지식은 곧바로 또하나의 지식으로 더해집니다.
영혼은 무수히 많은 지식을 생성하거나 끌어내 사람으로 지적인 행동을 하게하고, 외부의 어떤 상황에 반응 하는 것입니다.
영혼안에 어떤 종류의 지식이 있느냐에 따라 외부 상황에 반응하는 사람의 행동이 달라지는데 진리의 지식을 가졌다면 진리의 행동을 하게 되고 거짓된 지식을 가졌다면 거짓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한 전도자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나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복음에 대해 불쾌한 반응하며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비난하였다면, 그 사람의 영혼안에 있는 지식이 하나님과 복음에 관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기초 지식이 없기 때문에 전도자의 복음에 대해 반대 반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1
어떤 사람이 논리적으로 사고 결과를 도출할 때 자기안에 있는 지식들의 상호 유기적 연산으로 목적하거나 상황에 반응하는 새로운 지식을 산출합니다.
다른 말로하면 사람의 육체는 영혼안에 있는 지식들의 연산에 의해 행동을 드러내내거나 표현하는 Hardware 라면, 영혼안에 있는 지식들은 Software 입니다. Hardware 는 영혼 안에 있는 Software 의 종류에 따라 드러내는 결과는 다른데, software 는 지식입니다.
예수께서 유대인 바리새인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계신 장면에서 나타난 반응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에 관하여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안에 내 말이 거할 곳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식과 같은 동질의 지식이 유대 바리새인들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지식들만 있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실 것을 미리알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성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는 거짓된 지식을 미리 심겨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의 조건은 절대적인 신을 의미할 수 없습니다. 신은 절대적으로 사람이 되실 수 없고 신으로서 초월적 존재 이셔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신이라 칭함을 받으시려면 모세와 함께하셨던 하나님 처럼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리고, 만나를 주시고, 반석에서 물이나게 하시며,
전도자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두 사람을 예로 든다면, 하나는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복음에 의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지만, 다른 사람은 복음을 거절하고 완고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두사람 사이에 드러나는 행위를 복음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때, 이렇게 반응하게되는 원인이 자기의 영혼안에 있는 지식들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흠없는 제물은 육체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영혼안에 가득체워진 거짓된 지식은 그 사람의 본질을 의미하므로 거짓 행위를 하고, 진리로 가득체워져 있다면 진리의 행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드리는 제물이라고 할 때 이를 사람이 드리는 제의의 예물이라고 한다면, 그 제물이 드리는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으로 갖득체워진 사람은 어떤 조건으로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흠없는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구약의 율법은 바로 이점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흠없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도가 말한바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롬3:28)
그러나 자기 안에 죄를 가지지 않은 한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배푸셔서 죄없으신 하나님안에 있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요1:18)
하나님께서 독생하신 아들을 보내신 것은 순전히 은혜입니다.
저도
- 요한복음 8장 3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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