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쫓아 나타나나니(롬 1:18)
사도가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왜 복음을 이야기한 다음에 진노를 언급할 까요?
복음의 의미를 분명히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마치 조금한 심정을 표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해도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의미가 감하여 지지 않을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우리의 영혼에서 조명하는 것을 살펴 보십시오.
이 복음이 진리대로가 아닌 인간이 자기의 지식으로 이해하면 복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비췬 우리의 추악함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대적과 원수로서 충분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수 밖에 없음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며, 이 복음에 대한 왜곡된 지식이 더욱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 것을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로마서의 주제를 회개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반대하고 이 진술의 진정한 목적은 구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지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는데 있다고 Calvin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라고 말하면서 왜곡된 진리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과연 우리가 진리대로 신앙하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떠난 왜곡된 신앙이 이미 두터운 터전을 잡고 교회를 위협해 오고 있으며, 북 갈라디아와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유대주의적인 신앙과 고린도 교회의 지나친 자유를 강조한 왜곡된 신앙이 벌써 싹트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받았기 때문에 이 신앙이 이미 로마에도 전해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참된 구원은 참된 복음의 진리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사도의 생각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비기독교적인 신앙이 교회라는 이름 안에 터전을 잡고 자라고 있는 현실을 알게 된 사도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성자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비 복음적 교훈으로부터 돌아서거나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복음을 접한 사람에게 나타난 두 가지의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게 제사를 요구하실 때 그들이 명령을 들을 때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동등한 진리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사람들에게 나타난 결과들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사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의 진리를 자기의 지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함으로 진리의 주체자이신 하나님마저 자기 지식으로 판단하고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근데 철학의 주체를 확립한 르네 데카르트의 사상과 같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이 판단하고 그 판단으로 이해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신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이성은 없이는 신을 이해할 수 없고, 만약 이성으로 이해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참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이 근대 합리주의 철학의 사상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이성을 도구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인식되지 않으면 비록 신이라 할지라도 신이 되는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존재를 명확히 해줄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입니다. 만약 이 이성의 판명한 분명한 인식으로서의 신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신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보다 더 월등한 존재는 인간이고 인간에게서 가장 위대한 존재적 구성 요소는 이성입니다. 결국 근대 합리주의 철학에서 모든 만물 위에 이성이 있고, 이성이 만물을 자명하게 판단하여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가인의 사상을 이어받았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자기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자명하게 판별하였고, 그의 지성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하게 들었으나 그 음성조차도 자기의 이성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면됩니다. 실지로 이것은 자기의 지식이 판단한 것이지만 합리주의와 함께 생각할 때 가인이 판단한 하나님은 이성으로 판별하여 인식한 것이지, 계시하신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그대로 인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아벨은 하나님의 진리가 그의 영혼에 심기어졌고, 그 진리로 새로운 개념과 지식들이 생겨 나서 진리에 따라 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상은 근대주의 사상과 엄격히 대비되는 사상으로 종교개혁 이후 개혁 교회에서는 이러한 인식론적인 관점에 있어서 신학을 신앙의 빛인 계시중심 사상이었고, 이는 근데 철학과 맞붙어 싸워왔으나, 오늘에 있어서 그 결과는 처참하게 대 패하고, 교회 안에서도 계시 의존 사상은 교과서에 기록된 신학자들이 외워야 하는 용어로 생각 할뿐, 근대 합리주의 철학 사상에 근거한 합리적 이성의 판단에 의존하는 신학들이 교회를 뒤덮고 있는 실정입니다.
복음에 대해서도 동일한 경향을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자기의 지식으로 이해하고 판단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복음이 그 사람의 영혼에 심기어지고 복음으로 인하여 새 사람이 소생한 복음의 사람으로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은 복음을 왜곡되게 이해함으로, 이성 중심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초자연적 신비주의적인 사상으로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며, 그 진노가 하늘로부터 분명히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에게 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의 말이 틀렸거나 그의 판단이 잘못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의미를 명확하게 진리대로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사람들에게 아주 강력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외면보다 더한 진노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오직 한가지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믿음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죄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도록 독생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에게 모든 사람들의 죄를 씌우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의 죄를 예수께 뒤집어 씌우고 예수를 죽임으로 자기의 죄를 죽이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의인이 된 자기는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연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연합되지 않은 자는 비록 예수께서 죄를 씻었으나,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다시 죄에 속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완전하게 사람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과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외면하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예수를 믿거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 왜곡된 온갖 인간적 생각들로부터 생산된 복음들을 전하거나 믿는 그 자체가 이니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한 사람들은 현재 하나님의 진노아래 거하고 그들의 미래의 결과는 비참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미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들의 판단에서 임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떠난 신앙은 반드시 경건치 않은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지식이 아니고는 결코 경건함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진리를 떠난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선언합니다.
아멘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부활과 함께 개혁교회의 부활을 기대하면서 ..........
2013, 03, 31
'로마서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롬 1:20) (0) | 2013.04.03 |
---|---|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롬1:19) (0) | 2013.04.01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0) | 2013.03.30 |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롬 1:17) (0) | 2013.03.29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롬1:7) (0) | 2013.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