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욕구에 사로잡혀 밧세바를 범한 행위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을 받지 아니한 타락한 자기지식의 행위이고, 선지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는 것은 말씀의 조명이 그의 지성을 조명함으로 하나님 앞에선 자신을 기억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가 1주일 동한 세상에 속해 있다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느끼고 회개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은 참으로 진리를 선포해햐 합니다. 자기 스스로 성경을 말하니 자기의 말이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면서 지극히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말로 유명강사가 사설기관에서 강의하는 것보다 더 못한 수준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설교는 성경을 강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성도들에게 전하는 말씀으로 영혼에 선포하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영혼에 선포한다는 것은 타락한 영혼의 자기지식으로 판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독교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 곧 질서롭고 조화로움으로부터 결함이 없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조금도 결함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의 반응은 두 가지에서 뚜렸한 구별을 드러냅니다. 타락한 자기지성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지루함과 또한 자기의 영혼을 찌르는 분노, 견딜 수 없는 거부감으로 나타납니다. 영혼에 심겨진 말씀으로 인하여 거듭난 지성으로는 말씀에 대한 기쁨, 그 말씀을 지각함으로 육체의 어떤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인한 하나님에 대한 기쁨,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무한한 만족감,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린 지성의 기쁨 등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심장의 고동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영혼의 지성에 있는 같은 코드의 교통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지식이 없다면, 다윗을 비교해서 볼 때 분명히 가인처럼 변명하고 하나님을 떠나 피하려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자기의 죄가 드러난 것을 깨닫고 자기의 행위의 부도덕으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받을 비난을 피하려고 선지자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고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지식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이 지식으로 다윗은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는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구합니다.
하나님!
당신에게는 자비가 있으십니다.
그 자비를 내게 비추사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범죄했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렇게 말하는 다윗은 자기의 영혼에 관한 지식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자기가 자기를 돌아보니 자기의 행위가 추악하기 이를 대 없는 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이것도 아주 은밀히 행했으니 이는 하나님을 속이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밧세바와 은밀한 밀월을 나누고 있는 그 시간,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더럽고 죄를 씻지도 않은 몸으로 하나님의 사람인 다른 선지자들 앞에 여러번 섯을 것이며, 그들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고 자기의 죄가 들통 날까 안절부절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태연했고 나라를 위해 일하다 죽은 남편을 잃은 여인을 위로하고 품어줌으로 존경심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의 생각에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민심은 곧 천심”이라는 생각이 지배 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정확하게 하나님에 관하여 초점을 잃어버린 것, 곧 타락한 자기지식의 지성이 다윗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매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지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습니다.
범죄 한 다윗과 같이 죄를 감추고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으며 손에는 무수히 많은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 아주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과 같은 피를 물려받은 정욕의 자식들로 속이고, 감추고, 영광을 빼앗아 자기의 만족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서슴치 않은 추악,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그들이 듣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만나지도 않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진리의 음성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다 한번이라도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을 평생 써먹고 다시는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말씀은 자기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하나냐와 다름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기독교의 참 본질과 너무 벗어나 있습니다.
유명하다고 하는 설교자들의 설교는 지극히 세속적이며 성공주의적입니다.
그들의 사상은 잘되고 잘사며, 복되게 살며 성공하는 것만이 기독교입니다.
그들이 쏟아낸 설교들이나 책들에는 세상의 철학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자기신학들로 하나님의 선에 조화되지 않은 거듭나지 않은 지성에서 솟아내는 오염된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코드가 맞지 않은 지식들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진리를 차즈려하는 구도자의 자세를 갖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경에 대해 박사들입니다.
그들에게 진리는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앞에 있으며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마치 가인과 같이 하나님을 자기지식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인식하는 하나님은 자기지식으로 만들어낸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듭난 지성의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과 교통하기 때문에 자기의 죄가 적나라하게드러나고 백성들에게 손가락을 받게될 상황에 이르렀으나 자기의 자존심을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깨어난 거듭난 지성이 거듭나지 않은 자기지성이 행한 일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것은 자기를 파멸로 이끌어 가는데 곧 이 파멸에서 구원할자가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엇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를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구별하여 말했고, 우리는 이것을 거듭난 지성과 거듭나지 않은 지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기 영혼의 아픔을 가진 지성은 거듭나지 않은 자기지성이 자기에게 있어서 자기를 파멸시키는 행위들만 일삼고 결국 자기를 죽여야하는 비참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알고 있습니다.
모태에서 죄종에 태어난 운명!
아! 이 비참의 운명을 달고 사는 추악한 죄덩어리를,
용서 받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의 생명체 앞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면 거듭난 지성의 사람이 느끼는 큰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는 것십니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거듭난 지성이라도 거듭나지 않은 지성으로만 사는 사람드이 가는 그 비참한 죽음의 운명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울부 짖지 아니하고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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