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자신의 출생을 말할 수 있는 지성의 성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의 두 지성은 자기를 분명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성숙된 지성으로 성장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하나님을 의지하며 동행하던 날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영혼에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이 크게 성장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볼 뿐만 아니라 죄를 행하는 자기 안에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자기가 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하고 배반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사람이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출생을 죄악 중에 출생한 사람으로 죄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 중에 나를 잉태하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말하는 부모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도 죄인이라는 유전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태까지 우리 안에 있는 두 지성에 관하여 말해 왔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이것을 말해 왔는데 다윗의 말하는 죄 중에 잉태한 사람이라는 말에 쉽게 와 닿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대한 자존심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자존심은 우리의 두 지성 가운데 어느 지성에 속한 지식일까요? 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지성이 우리 자신의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기변호의 고집으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우리의 존재의 비밀을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보고 있습니다. 완전히 객관적으로 자기를 보는데 그 보이는 자가 옛 자신입니다. 그의 존재는 부모의 죄 중에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죄만 행할 뿐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한 존재입니다. 그 존재는 자신이고 자기 안에 자기와 같이 있으며, 그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본질입니다. 그가 죄의 본질인 자기 안에 있는 자신을 볼 때 하나님을 속이고 반역하며 하나님을 모른다하고, 알지 못하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를 괴롭히고 자기를 파멸로 이끌고 가는 깨닫지 못하는 짐승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에게 자신을 맡기면 분명히 비참한 결과 밖에는 다른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치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어떤 한 짐승 같은 두 영혼을 가진 존재와 같이 자기 안에 죄의 본질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실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재는 하나님을 아는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아는 자신을 지으셨고 그 존재가 이 땅에 많아져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이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존재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배반하며 멸시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니라 바로 죄중에 태어난 자기 안에 있는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안에 하나님을 아는 내가 태어나기를 원했는데 어머니께서 죄중에 나를 낳으셔서 내가 아닌 죄의 존재인 내가 태어나 나를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들은 낙원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얻는 지성의 충만함과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지성의 작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영혼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조명은 지식을 생성하여 지각함으로 인하여 무한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을 때 하나님의 형상과 교제까지 모두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지성에 찾아온 어두움으로 인해 그들은 육체의 감각에 의존하는 상태가 되었고 감각은 쾌락과 욕구들을 영혼의 지성에 쏟아부어 그것들로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타락하고 처음 행한 일이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동침으로 인해 가인을 얻었고 하와는 가인을 얻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들이 동침함으로 아벨을 낳았는데 이 두 사람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분명한 표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뚜렸한 구별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둘의 구별이 있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이런 내용들을 접근할 때 결코 자기지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관적인 해석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끝까지 객관적인 자세에서 이 문제들을 살펴 보고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에 이르는 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란 질서롭고 조화로운 판단에 이르는 답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어지는 문제들을 차근 차근 짚어갈 때 다윗의 영혼에 있는 두 지성간에 죄를 범하는 지성을 이 둘로부터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너무도 자주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와가 가인을 낳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고백을 했으나 이 고백은 잘못된 판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성경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한 사람이 하나님을 모를리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았다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였어야 합니다. 하나님 뜻에 맞는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는 어떤 자세가 보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어서 어디에 가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분명한 무소부재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런 조건들이 모두 반대로 행하는 사람임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모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표준적인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여 죽이는 분노를 드러내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사람이 아들을 낳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처음 아들을 실패하는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끔찍한 죄를 범하였고 끝내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은 자식이었습니다.
여기에 무수히 만은 신학적인 조화들을 어울려 맞추어진 해석들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이 신학적 지식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조화되지 않은 지식을 고집한다면 그 지식은 처음부터 거듭나지 않은 지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투성이의 신학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을 낳은 아담과 하와의 잉태에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잉태한 그 행위와 하나님의 섭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인본주의적인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선보다는 사람 중심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신학들을 자기중심의 인본주의적인 초점에 맞추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태어나도록 예정하셨는데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음으로 그에게 죄가 유전되거나 전가되어 타락의 모습이 그에게 드러나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죄의 요소가 있고 그는 죄를 행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며, 어떤 상태로든지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자기스스로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말한바 죄중에 잉태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아담의 대표적인 죄는 그에게 있어서 억울함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욕의 정체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거듭난 영혼의 지식이 아닌 거듭나지 않은 지성의 지식이 정욕을 이해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의 정욕의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인 약속의 아들과 버림받은 아들 쌍둥이를 낳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동안 정욕과 하나님께서 생육하게 하는 동침과의 관계를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정상적인 법적인 절차를 통해 동침하는 것을 정욕이라고 보는 것을 타당하지 않다는 의견들을 말하고, 범죄라고 판단된 행위를 정욕이라고 하는 구별을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 후 가인을 낳은 것은 정욕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한바 이삭과 리브가의 동침으로 야곱과 에서를 낳게 되는 동침이 정욕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정욕으로 인하여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생식의 기능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결코 하나님을 모르는 자식을 생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욕은 본질상 생식을 위하여 있게 하신 것이지만 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그 결과적 열매들을 기대하고 행하는 행위를 가지므로 질서롭고 조화로운 삶에 기쁨을 누리고 정욕으로 인한 기쁨에 결코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선에 합당한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가인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삭과 리브가가 에서를 낳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방인인 우리들이 이 땅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 존속해 왔다면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아름다운 천국이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작정하신 사람들만 이 땅에 태어나 아름다운 낙원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낳지 않아도 되는 잉여의 자식들이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다윗이 본 자기 안에 있는 거듭나지 않은 지성의 지식들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하여 정욕을 일으켜 낳은 사람들이고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지옥으로 가도록 태어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은혜 없는 아들들로 이 땅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마음대로 생각하고 멸시하고 왜곡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는데, 당신의 형제들이신 하나님의 아들들의 손에 의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원의 반열에서 버리시고 대신 하나님을 모르는 우리를 택하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존재하게 한 죄를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물을 수 없도록 화목하셨고 하나님의 들들을 대신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엡2장).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죽이는 반역을 행하는 엄청난 일로 인하여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함께 상속자가 되고, 이것은 바울이 깨달은 비밀이라고 했습니다(엡3:4~5).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이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은혜로 우리에게 넘겨 온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롬11:11), 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고 너희 들은 믿음으로 섰느니라(롬11:20)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 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롬11:30)”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은 본래 구원을 얻을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죽이고 배반함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가 이방인인 우리에게 넘어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이방인은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으심으로 구원이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본래 이방인은 하나님의 작정과 전혀 관계없는 죄로 말미암아 허락된 존재들이고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범죄 함으로 정욕을 일으켜 낳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를 부모가 죄중에 자기를 잉태 했다고 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의 지성으로 볼 때 자기는 구원과 전혀 관계없는 죄의 존재였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곧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모르는 거짓된 지성이 곧 정욕으로 낳은 존재라는 것을 본 것입니다. 이 시각이 있는 지식을 가진 지성은 하나님의 창조와 아담안에서의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과의 관계를 볼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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