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롬3:5) 2,

생명있는 신앙 2013. 9. 7. 14:00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3:5)

 

하나님의 의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발견됩니다. 이 십자가에 대한 증언이 복음이고,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함의 되어 있어서 사도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사도가 말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사도의 증언만을 기록하지 않고 다른 성경에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증언되고 있습니다.(7:9,11,에스라 9:15, 116:5, 5:16, 32:4),

그러나 사도가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게 된 것은 직접 그리스도를 만남과 자신 영혼의 지성이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지식을 가지게 됨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의 영혼에서 조명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고하나님의 의에 관한 주제를 살펴보는 동안 사도의 사상 전반적인 테마를 살펴보아야 하는 필연적인 과제에 도달한 것입니다.

저는 로마서를 시작한 후 3장에 이르러 이 고개를 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 주제는 로마서 전체 뿐만 아니라 사도의 복음 전체의 핵심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이데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에 관한 진리의 동산을 산책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 동산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진리들을 살펴 볼 것입니다.

사도가 로마서 4:25에서 말한바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살펴 볼 것인데, 가장 먼저 우리가 진리의 동산 입구에 서서 동산을 살펴 볼 수 없으므로 동산에 입장하여 진리들을 확실히 보고 만지며 느낌을 갖고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동산에 입장을 어떻게 합니까?

이 동산은 반드시 복음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진리의 동산에 들어가는 문은 복음외에 다른 문이 없습니다.  
복음의 문 앞에 선 사람들은 이 문이 자기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복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기 이 문의 중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하여 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복음을 자기의 지식, 혹은 자기 개념을 만들어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바라봄으로 많은 유익을 누리고 기쁨을 경험하였을지라도, 복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진리의 동산을 누비고, 생명을 공급하는 생수를 먹으며, 몸에 진리의 생수가 흐르도록 하여 자신을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문 밖에 서서 너머에 있는 진리의 동산을 바라보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여 이해하고 자기가 진리를 경험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세상에는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당당히 들어가서 진리의 생수를 마시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21세기에 이른 이 시대 교회는 복음의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가로막고 문 너머의 진리의 동산을 왜곡되게 설명하며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다가 복음을 자기의 사욕으로 삼아 종교적인 이득을 취하는 사업이나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이런 혼탁한 시대에 참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나선 사람이 교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많은 신학자들이나 진리의 설교를 외칠 수 있는 설교자들이 설교할 강단이 없어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들을 준비 시켜서 반드시 사용하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들이 더욱 연약하여지고 힘이 없어 지쳐 있을때 하나님의 손길이 그를 들어 세우실 것이며, 그들의 입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 같이 쏟아지게하여 사람의 더러운 때를 벗겨 낼 것입니다.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이고 그 일이 하나님의 의를 분명하게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의 종들을 인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동산에 들어가기 위해 열어젖힌 복음의 문을 살펴보세요?

무엇으로 만들었습니까?

손으로 만져 보세요?

아무도 느끼지 못하였으나 실지로 그 문은 주님의 몸이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아름답고 좋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문 앞에서 대문을 밀고 들어가려고 문에 손바닥을 대고 밀려하니 아무도 만질 것 같지 않은 주님의 살이었습니다.

충격입니다.

이 충격의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문에 손을 대기 전에 반드시 '참된 복음'을 분명히 들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약 그가 들은 복음이 참된 복음이 아니면 손을 내밀어 복음의 문에 대자마자 놀라 자빠지고, 들어가기를 꺼려하여 자기가 들었던 복음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들었던 그 복음으로 종교를 항유 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문을 열고 들어갈 사람은 반드시 참된 복음을 들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복음이 있습니다. 성공주의, 기복주의, 행복주의, 사회주의 등, 그리고 각종 이단들의 복음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복음을 말하고 있고, 근래에 이르러서 내적치유라든가, 신사도 운동, 구원파, 신천지, 알파복음, 천주교, 안식일,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다락방, 어머니 하나님 등 아주 이상하고 야릇한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옆에 포진하고 있어서 여러분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은 성공주의 교회들입니다. 이들은 교묘하게도 정통 기독교 안에 아주 깊숙이 자리 잡고 정통 교회의 간판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가 말한 바에 의하면 육적입니다.

범사에 그리스도를 말하고 정통교회의 예배와 신앙고백을 확실히 사용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고도 분명하고 또렷하게 말 하고 자칭 자기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주 정통해 있는 사람들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무지함으로 왜곡되게 말할 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전통적인 교리를 따른다고 하지만 교리의 1/10로 소화하지 못하고, 가인과 같이 제마음대로입니다.

그들이 선포하는 설교를 들어 보십시오?

한 마디라도 복음과 조화되는 말을 찾아 볼 수 없는데, 말 시작과 끝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말하고 많은 지식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지식들로 복음을 설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과 칭찬을 한몸에 받고 있습니다. 
들이 바로 복음의 문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앞에 세워두고 진리의 동산으로 들어가려는 여러분을 가로막고 확성기를 들고 자기가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고 외쳐대는 관광안내 가이드 같은 사람들입니다.

대문을 밀어 열던 손을 대문에서 때어내 보세요?

손바닥에 묻어나온 뭔가를 느끼지 않습니까?

깊은 산 계곡 바위 절벽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흘러내리는 물에 이끼가 끼인 바위를 만졌을 때,

차갑고 뭉클거리는 미끄러움,

싸늘하고 음흉하며 기분을 빼앗아가는 그런 느낌이 복음의 대문을 열기 위해 밀려던 손 바닥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붉은 피,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을 당하시며 흘리신 주님의 보혈이 당신의 손바닥에 발려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복음을 듣고 구원의 기쁨을 만끽할 것 같은 기분으로 진리의 동산으로 들어가는 첫 대문에서 묻은 주님의 보혈로 인하여 영혼은 골로다 언덕을 산책하여 보게 됩니다.

진리의 동산에 들어서는 첫 발 자욱에서 부터, 주님의 보혈을 감각하지 않으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진리의 동산으로 가는 길은 누구나 다 해야 합니다.

쇠를 때리는 망치소리,

하늘 깊이 보좌까지 솟구치는 고통의 부르짖음,

흐느껴 우는 여인들의 절규,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한 사람이 뚜렷하게 시야에 들어옵니다.

한 번에 알아 볼 수 있는 말씀이신 하나님,

사람들의 아픔을 치료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으며,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넓은 통나무 열 십자에 손에 못이 박히는 그 고통으로 정신을 잃고 말이 없습니다.

얼굴에 연신 땀을 닦아가며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눈에 들어옵니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쇠망치를 손에 들었는데,

그의 손에는 피가 가득 묻혀있고,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각자 자기의 일을 분담하는데 이들의 얼굴이 한결같이 동일합니다.

너무도 이상하여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은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고통보다 그 사람들의 모습이 더 관심이 갔습니다.

도대체 왜 저 사람들은 다 똑 같을까?

복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그 사람은 주님을 아주 열심히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그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 얼굴은 잔인하기 이를 대 없습니다.
인자한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긍휼을 베풀 그 무엇도 나타나 보이지 않습니다. 잔인하기가 식육 짐승을 잡는 사람과 같고, 냉정하기가 분을 토해내는 사자와 같습니다. 용서를 모르는 완벽한 망치질은 심장을 단번에 꽤 뚫고 지나가는 화살과 같이 날카롭습니다.

손은 아주 능숙하여 아무라고 피하여 도망갈 수 없게 잡고 있으며 망치질은 어떻게라도 더 고통을 주려고 잔인하게 내려치고 있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화를 내려는 순간 그가 자기를 내려다보는 잔인한 눈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잡아 십자가에 못 박을 듯이 내려다보았습니다.

으악

뒷걸음도 치지도 못하고 그 문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번의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날마다 자기를 보는 사람입니다.
너무 큰 충격에 다시 눈을 뜨고 쳐다본 순간 도저히 기절하지 않고는 그를 볼 수가 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

이게 뭡니까?

내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까?

말도 안됩니다.

충격, 절망,

눈이 뒤집히고 가슴의 숨은 가빠 오르면서 심장은 터질 듯이 박동하여 더욱 흥분을 일으켰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싶은 아픔이 나를 뒤집어 감쌌습니다.

난 아니야!, 난 아니란 말이야!

내가 왜 예수를 죽이니!"

복음의 문에 들어서서 절규를 하는 사람,

구원의 문에 들어선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