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성을 밝혀준다는 의미에 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애굽이나 가나안 사람들에게 혹은 페르시아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조차 주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게 있었으며 그들을 향하여 역사를 이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정리한 후 나머지 역사를 걸러내면 이스라엘 역사밖에 남지 않고 다른 역사들은 걸러져 나가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1장에서도 분명히 말하기를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구별되어진 존재이고 이 존재 구별의 표준은 하나님의 선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 자신조차도 스스로 자신의 이기적인 의지를 표준하지 않으시고 선에 가두셨고 그 선을 기준한 의에 표준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정하신이가 하나님이시고, 의로 정하여진 대로 스스로 행하시고, 그분이 만물을 만들고 자신에게는 모든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선에 가두어 모든 피조물에게조차 자신의 부당함을 드러내지 않으시려는 완전하심 아래 자신을 내려놓으신 창조주 하나님에게서는 아무런 흠을 발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별이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시의 의지에 의해 판단하신 것이 아니라 선을 기준하여 판단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구별한 것에 대해서 아무도 하나님을 비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세상에 속한 우리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으로 생각하고 비난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나친 독선주의자 이며, 자기 외에 다른 종교는 일체 인정하지 않은 이기주의자라고 함부로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이런 판단을 아셨고, 이들의 비난을 피하시기 위해 당신을 선에 가두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주이시지만 스스로 자신을 높여 공평한 판단을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스스로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실 수 있고 자신만의 판단이 옳음을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의 판단이 부정함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선의 판단에 두셨고, 선이 자신을 판단하시는 것을 결코 마다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시고 만물의 시야에 자신을 드러내신다면 피조물이 그 영광 아래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보고도 믿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선 뒤에 감추시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보이셔서 마치 선이 모두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 뒤에 숨으실지라도 선이 결코 하나님보다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선이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판단할지라도 하나님보다 위에 둘 수 없습니다.
사도는 이를 잘 알고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과 같으니라(롬3:4)”라고 말했습니다. 더하여 로마서 2장 하반절과 3장에 걸쳐 이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행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자기의 독선이 아니라 선에 기준하여 그 심판이 의롭다 하심을 염두에 두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의 판단이 의롭다는 것이 당신의 판단이 아니라 완전히 객관적인 판단임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는 이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판단할 때 하나님께서도 판단을 받으시는 선에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고 자기의 불의를 판단하는 선으로부터 자신을 돌이켜 고집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꺾어 보려는 오만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으로 하여금 당신을 판단하게 하시는데 사람은 선으로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가 더러움으로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의 행위를 옳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율법이 없으면 범법함도 없느니라” 라는 사도의 말을 받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율법을 받은 사람에게 말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받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율을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율법에 넘어져 의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실지로 율법은 의를 이루도록 보내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정죄하기 위해서 보내어진 것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는 이방인으로는 자기의 정체성을 볼 수 있는 율법을 주시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에게만 주셨던 것입니다.
사도의 말에 의하면 율법이 의를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율법을 볼 때 마다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의지하고 더욱 자기를 구원할 메시야를 고대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 조차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향하여는 아무런 은혜를 내리지 않으셨고 이스라엘과 같이 대우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은혜를 받지 못함으로 우리가 죄인 것조차 알 수 없는 버림받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 구원이 무엇인지 이해됩니까?
본래 구원은 우리에게 해당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로마서 11장에서 긴 문장으로 말하기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이르러(롬11:11)”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넘어지지 않았다면 구원은 우리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과 율법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의 말에 의하면 율법은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기까지 있을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들이 기다리는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들은 율법이 제시하는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으로 회개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율법으로는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율법이 명하는 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 라고 말합니다.
'로마서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 (롬4:16) (0) | 2014.10.22 |
---|---|
모든 사람의 조상 (롬4:16) (0) | 2014.10.20 |
진노하는 율법 8(롬4:15) (0) | 2014.10.07 |
진노하는 율법 7 (롬4:15) (0) | 2014.10.06 |
진노하는 율법 6(롬4:15) (0) | 2014.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