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4:16)
실지로 육에 속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낳을 수 있고 이삭도 낳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들을 낳을 지라도 그 신분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스마엘 처럼 육에 속한 사람이 있고 이삭처럼 약속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사람의 정욕으로 얼마든지 낳을 수 있지만 약속의 아들은 하나님의 뜻 곧 창조의 계획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시간적 관념으로 생각하면 신학적인 오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세전에 계획하신 것을 지금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정욕의 아들과 하나님의 작정의 아들들로 혼합되었는데, 작정의 아들들의 가족을 따로 구별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로 인하여 정욕의 아들과 작정의 아들이 분명히 구별되어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약속의 아들과 종의 아들입니다.
이처럼 분명히 구별된 두 아들은 한 사람 아브라함에게서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사람의 아들이지만 실지로 하나님의 계획에 속한 참 사람의 아들을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만이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서 예정과 선택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에 까지 이어지고, 구원의 확신과 성도의 생활에 까지 심각한 태만과 오해를 불러오는 경향을 낳았습니다.
대부분의 개혁교회의 신앙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이 땅에 태어나고 하나님을 믿을 것이 예정되어 있으며, 결국은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므로 삶의 가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마음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신앙을 가지고 있고, 교회는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바울 신학이 개개인의 구원이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1:4)”에서 말한 의미는 칼빈이 말하는 이중예정의 의미입니다.
칼빈은 이 이중예정을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로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의 이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택의 근거인 "그리스도 안에서”와 오늘 날 모든 교회들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개개인의 예정”이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날 개혁교회는 칼빈의 이중 예정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인들의 삶의 모습이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예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신앙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이나 오순절 주의자들은 칼빈의 예정론을 심각한 오류라고 주장하고 예지 예정을 주장했지만, 알미니안 주의자들이나 개혁교회 신앙인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성도들이나 한결 같이 간과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중에 갈라디아 3:14에서 말하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 미치게 하고”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인가?
그 복이 예수 안에서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복을 세상의 물질과 영화로운 삶의 축복으로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메 가는 곳마다 재산이 불어나 거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물질이 많고, 지위가 높아져 명예를 얻은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물질이 없어도, 명예를 얻지 못했을지라도. 마음이 행복하면 그것이 복입니다.”라고 선포하지만, 실지로는 교회 자신이 성공을 향하여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성도로 하여금 축복을 받아 경제적으로 부유하기를 기도하고, 성도가 잘되고 축복받아 사업이 성장하는 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삶에 고통을 당하고 질병이 있으면 ‘신앙생활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복은 물질적인 축복으로 뒤바꿔버렸습니다.
물질이 없어 가난한 이웃을 찾아가 위로하며 용기를 주지도 못하고, 병든 심령을 위로하거나 이겨낼 힘을 주지도 못하고, 이웃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철저히 외면하고 있으면서, 모두가 물질이 부족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주저앉아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가 많아져야 하고, 교회의 세력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부흥을 외치고 말로는 부와 명예가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지로 가난한 것은 신앙생활을 잘못 하였거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진실로 오늘의 대부분의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복과는 전혀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칼빈의 그리스도안에서 예정을 개개인의 예정을 말하는 것인지 교회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로 하여금 확신이 없는 구원의 지식으로만 가르치고 외적인 성장을 도모하면서 가난이 믿음의 결과라고는 말하면서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이라는 이중적인 교리적 적용으로 성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설령 여러분들의 생각에 우리가 존경하는 칼빈 선생이 그리스도안에서 예정을 성도 개개인의 예정이라고 말했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러면 그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주장입니까?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앞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을 분명히 구별하였습니다. 이 구별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리스도 안에서"가 어떤 모순이 있는지 살펴 보십시오.
더 분명하게는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를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접붙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방인이나 돌감람 나무는 그리스도안에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 보십시오.
사도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종의 아들, 돌 감람나무의 의미가 무엇을 말합니까?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버림받고 저주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칼빈이 이를 몰랐을까요?
바울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의미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사" 라고 말한 의미를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개개인의 예정으로 생각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말합니다.
“그 사상의 열매가 오늘 우리 교회와 당신의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안에서"라는 말은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라는 말에 의미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에게 이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시켜줄 어떤 정의가 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이 말하는 칼빈의 예정론을 여러분들이 얼마나 왜곡시키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개개인의 구원에 대한 예정,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사.(엡1:4)”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두 가지의 의미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이방인 개개인의 구원과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선과 이방인의 작정입니다.
우리는 늘 이방인의 정체성에 관하여 정직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은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한 존재로 인식하려고 합니다. 이 치밀하고도 야비하며 솔직하지 못한 사상으로 인해 이방인 기독교는 항상 타락의 길을 향하여 삐뚤어져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창세전에 아담 안에서 계획으로 말미암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획에 의해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을 일으킨 결과에 의해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존재한 것 뿐입니다.
사도가 말한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상속을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가 분명히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마엘과 이삭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고, 그들에 의하면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약속에 의해 낳은 아들 이삭이고, 사람의 꾀와 정욕으로 말미암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가족에 함께 거할 수 없었고 버림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종의 아들, 이는 하나님의 책임과 관계없는 순전히 죄에 의해서만 존재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도록 허락해주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은혜이고, 잠시 존재하고 영원한 저주를 당하는 비극에 처해지는 비참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주님께서 가롯 유다를 향하여 언급하신 말씀이 우리의 뼈에 사무치도록 와 닿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개 개인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의 신분은 분명히 확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반드시 태어나야 하지만, 다른 이는 태어나도록 허락되어진 존재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불평등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는 죄로 말미암은 허락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배제할 수 없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혹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계획과는 관계없는 영원한 저주에 속한 버림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무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중 예정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칼빈 선생이 어떤 의미이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살펴 볼일이지만 실지로 그 의미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분명한 사실에는 더 명확하게 해야 할 의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버림받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인지 살피는 것입니다. 만약 예정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쓸대 없는 일을 하셔서 애먼 사람들을 존재하게 하여 지옥을 만드셨고, 결국은 버림받은 악의 존재들을 지으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운명들에 대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의 범죄 행위의 동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원인에 대한 책임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도 충분히 살피고 지나왔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피조물로서의 위대함을 하나님께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작품인 사람은 실로 흠이 없이 완벽합니다.
특히 그들의 영혼에 있는 지성은 정말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너무 놀랍고 위대하며 세상을 지배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심으로 모든 창조의 완성을 이루시고, 사람의 타락으로 인하여 사람의 옷을 입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사람과 함께하셔서 피조물의 위대하심을 스스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저는 아직 까지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의 정원을 여러분에게 열어보여 드렸습니다. 이것은 저의 지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위하여 저를 통해 비춰 주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고 허락하신 일이지만 그것은 사람이 정욕을 일으켜 사람을 낳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 타락으로 인하여 정욕을 제어하지 못한 사람이 계속해서 사람을 낳는 것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보였고, 아담과 하와에게서 보이셨습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사라와 공모하여 하갈에게서 약속에 없는 이스마엘을 낳았고,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후 정욕에 이끌려 동침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없고, 아담이 가인을 낳았지만 하나님의 선에 합당하지 않은 가인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택이라는 논리로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를 저울질하여 둘 가운데 이삭을 택하였다는 의미로 연결하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기울여 성경을 살펴 보아도 선택의 관점으로 이해되도록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약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으면서도 사라와 공모하여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고,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정욕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열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를 향하여 열심을 내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점으로 볼때 자기들의 행위가 교회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라고 감동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들의 열심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열심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씨를 주셨다고 말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낳도록 조장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잘못된 이중 예정로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낳도록 하시는 것도 예정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세상에 존재하였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아무 일도 세상에 존재 할 수 없으니, 이스마엘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하와가 하나님의 약속을 왜곡하지 않고, 기다리고 인내하였더라면 이스마엘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 나아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가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아담의 후손인 창조 때, 계획에 의해 존재한 사람들이 정욕을 일으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질서대로 작정된 아들들만 낳았다면, 오늘 우리 이방인들은 존재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들어간 죄로 인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정욕과 죄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탄생을 아시고 허락하셨을 뿐 아담 안에서 우리를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나누어 생각하는 사고를 가졌고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에게 말하는데도 칼빈 선생의 예정론은 결정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렇지 않다고 지금 바꾸셔야 합니다. 그가 결정론적인 의미로 말을 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스마엘과 이삭, 가인과 아벨에 대한 하나님의 선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칼빈이 저와 같이 미천한 사람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솔직히 칼빈을 매우 존경합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폭넓게 이해하고 듣습니다.
그가 설명하려는 주제의 제목들은 바울과 어거스틴 이후에 그 누구도 감히 언급할 수 없는 비밀들을 열어젖혀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찢어진 휘막 안 지성소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듯이 칼빈 선생이 열어주는 성경의 비밀들을 그가 안내해주는 지시에 따라 살펴보면서 하나님을 더욱 영광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주의 개혁신학이 왜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인지 그의 지혜가 쏟아낸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실 때 이방인의 존재에 대한 계획이 작정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답을 말하라 한다면 저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칼빈이 그렇게 단정하여 말하지는 않았으나 깊은 내용은 우리의 시야로 발견하도록 휘장을 열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매우 섭섭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 속하여 계획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죄의 정욕의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 이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잘 압니다.
매우 많은 신학자들과 성도들이 저의 이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쉬운 주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필연적으로 칼빈의 이중예정을 오해하게 된다고 분명히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과 이방인의 작정에 관한 의미를 살펴볼 때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방인에게 율법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단순히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실지로 사도의 사상에는 이스라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확고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은 후, 이스라엘이 잠시 동안 버림을 받고 그동안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이 이르렀다는 사상은 유대주의에서 매우 이단적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은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방인의 구원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교리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의 규칙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이 무엇입니까?
‘선’은 질서로움과 조화로움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스스로를 이 선의 규칙에 따라 사역하십니다. 어떤 일이라도 이 선의 규칙을 벗어나서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을 선에 가두셔서 행하시고 자유를 포기하셨다고 감히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더욱 공의가 되게 하기 위한 객관적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라도 자기의 생각대로 판단하시지 않으시고 완전히 객관적인 판단에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유로우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역을 선의 규칙에서 어긋나지 않게 행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의 선과 이방인의 작정이 예정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이방인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선이 서로 조화되는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질서이며 조화입니다.
이 두 가지의 내용에 부합할 때 하나님의 기쁨이 충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그 단어에서부터 질서와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존재하기로 계획되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존재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을 일으켜 낳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근원은 죄와 정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에 적용되지 않는 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지만 적용되지 않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가인에게 분명히 보였고, 이스마엘에게 보였습니다. 더 나아가 에서에게도 보였습니다.
가인을 잘 살펴 보십시오.
성경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 보면 가인은 완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대화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출생의 신분이 하나님의 선을 적용받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데 이방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이 땅에 존재하게 되느냐고 말하며, 모세와 바로를 들어 비록 사람들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의 존재가 되었지만 그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에 정욕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이방인도 하나님께서 계획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며, 죄로 말미암은 정욕에 의한 이방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여러분의 영혼의 지성이 찬란하게 하나님의 형상의 빛이 비춰준다면 여러분의 지식은 어떨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진리의 지식만을 가질 것입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이 진리의 지식만 가진다면 하나님의 선이 무엇인지 알 것이고, 그리고 정욕이 일어날 때 여러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만 하고 뒤처리는 생각하지 않은 그런 정욕을 지식으로 다스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으로부터 일어난 정욕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육체는 영혼의 노예가 되어 영혼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영혼에 있는 왜곡되고 타락한 지식은 여러분을 죄로 더욱 더럽게 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세상은 저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순간 세상은 저를 미워하고 원수로 여깁니다.
왜 그럴까요?
내속에 있는 왜곡되고 타락된 지식인 죄가 세상의 이방인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저도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는 영혼을 가졌었습니다.
그때 저의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는 원인이 그들이 죄를 범하여 저를 이 세상에 있게 하고 제가 이 세상을 수고롭고 고생스럽게 살다가 죽어서 지옥에 가는 비참한 존재로 있게 한 것이 더 미웠던 것입니다. 그들이 정욕을 일으키지 않아서 나와 우리의 조상들을 낳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옥에 가지도 않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을 탠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나를 이 땅에 있게 함으로 우리에게 지옥의 저주와 이 세상에서의 오류와 왜곡으로 인한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자 우리는 그 정욕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씌워서 잔인하게 죽여버린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고나니,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결국은 이방인을 이 세상에 있게 한 십자가를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고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라고 강령을 말씀하신 의미를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은 하나님의 선과 이방인의 작정에 관한 의미에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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