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개개인의 구원에 대한 예정,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사.(엡1:4)”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두가지의 의미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이방인 개개인의 구원과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선과 이방인의 작정입니다.
우리는 늘 이방인의 정체성에 관하여 정직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은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한 존재로 인식하려고 합니다. 이 치밀하고도 야비하며 솔직하지 못한 사상으로 인해 이방인 기독교는 항상 타락의 길을 향하여 삐뚤어져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입니다.
창세전에 아담 안에서 계획으로 말미암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획에 의해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을 일으킨 결과에 의해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존재한 것 뿐입니다.
사도가 말한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상속을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가 분명히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마엘과 이삭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고, 그들에 의하면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약속에 의해 낳은 아들 이삭이고, 사람의 꾀와 정욕으로 말미암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가족에 함께 거할 수 없었고 버림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종의 아들, 이는 하나님의 책임과 관계없는 순전히 죄에 의해서만 존재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도록 허락해주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은혜이고, 잠시 존재하고 영원한 저주를 당하는 비극에 처해지는 비참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주님께서 가롯 유다를 향하여 언급하신 말씀이 우리의 뼈에 사무치도록 와 닿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개 개인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의 신분은 분명히 확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반드시 태어나야 하지만, 다른 이는 태어나도록 허락되어진 존재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불평등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는 죄로 말미암은 허락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배제할 수 없는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혹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계획과는 관계없는 영원한 저주에 속한 버림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무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중 예정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칼빈 선생이 어떤 의미이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살펴 볼일이지만 실지로 그 의미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분명한 사실에는 더 명확하게 해야 할 의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버림받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인지 살피는 것입니다. 만약 예정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쓸대 없는 일을 하셔서 애먼 사람들을 존재하게 하여 지옥을 만드셨고, 결국은 버림받은 악의 존재들을 지으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인 운명들에 대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의 범죄 행위의 동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원인에 대한 책임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도 충분히 살피고 지나왔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피조물로서의 위대함을 하나님께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작품인 사람은 실로 흠이 없이 완벽합니다.
특히 그들의 영혼에 있는 지성은 정말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너무 놀랍고 위대하며 세상을 지배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심으로 모든 창조의 완성을 이루시고, 사람의 타락으로 인하여 사람의 옷을 입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사람과 함께하셔서 피조물의 위대하심을 스스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저는 아직 까지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의 정원을 여러분에게 열어보여 드렸습니다. 이것은 저의 지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위하여 저를 통해 비춰 주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고 허락하신 일이지만 그것은 사람이 정욕을 일으켜 사람을 낳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 타락으로 인하여 정욕을 제어하지 못한 사람이 계속해서 사람을 낳는 것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보였고, 아담과 하와에게서 보이셨습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사라와 공모하여 하갈에게서 약속에 없는 이스마엘을 낳았고,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후 정욕에 이끌려 동침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없고, 아담이 가인을 낳았지만 하나님의 선에 합당하지 않은 가인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택이라는 논리로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를 저울질하여 둘 가운데 이삭을 택하였다는 의미로 연결하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기울여 성경을 살펴 보아도 선택의 관점으로 이해되도록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약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으면서도 사라와 공모하여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고,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정욕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열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를 향하여 열심을 내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셨을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점으로 볼때 자기들의 행위가 교회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라고 감동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열심으로 이루려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 지극히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낳도록 조장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잘못된 이중 예정로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낳도록 하시는 것도 예정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세상에 존재하였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으며,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아무일도 세상에 존재 할 수 없으니 이스마엘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하와가 하나님의 약속을 왜곡하지 않고 기다리고 인내하였더라면 이스마엘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 나아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가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아담의 후손인 창조 때 계획에 의해 존재한 사람들이 정욕을 일으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질서대로 작정된 아들들만 낳았다면 오늘 우리 이방인들은 존재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들어간 죄로 인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정욕과 죄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탄생을 아시고 허락하셨을 뿐 아담 안에서 우리를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나누어 생각하는 사고를 가졌고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에게 말하는데도 칼빈 선생의 예정론은 결정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렇지 않다고 지금 바꾸셔야 합니다. 그가 결정론적인 의미로 말을 했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스마엘과 이삭, 가인과 아벨에 대한 하나님의 선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칼빈 선생이 저와 같인 미천한 사람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솔직히 칼빈 선생을 매우 존경합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폭넓게 이해하고 듣습니다.
그가 설명하려는 주제의 제목들은 바울과 어거스틴 이후에 그 누구도 감히 언급할 수 없는 비밀들을 열어졎혀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찢어진 지성소의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듯이 성경의 비밀들을 그가 안내해주는 지시에 따라 살펴보면서 하나님을 더욱 영광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주의 개혁신학이 왜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인지 그의 지혜가 쏟아낸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실 때 이방인의 존재에 대한 계획이 작정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답을 말하라 한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매우 섭섭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 속하여 계획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죄의 정욕의 원인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이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잘 압니다.
예전에 이런 주장으로 무수히 많은 논쟁들이 있어서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용납하게 된 것은 저의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욕의 열매로 말미암았다는 복음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확인한 후 부터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과 이방인의 작정에 관한 의미를 살펴볼 때 분명히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이방인에게 율법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단순히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실지로 사도의 사상에는 이스라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상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은 후로 이스라엘이 잠시 동안 버림을 받고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의 규칙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이 무엇입니까?
선은 질서로움과 조화로움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스스로를 이 선의 규칙에 따라 사역하십니다. 어떤 일이라도 이 선의 규칙을 벗어나서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을 선에 가두셔서 행하시고 자유를 포기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우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역을 선의 규칙에서 어긋나지 않게 행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의 선과 이방인의 작정이 예정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먼저 이방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이 적용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질서이며 조화입니다. 이 두 가지의 내용에 부합할 때 하나님의 기쁨이 충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그 단어에서부터 질서와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작정되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정욕을 일으켜 낳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이 이방인에게 결코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성경이 말하는데 이방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이 땅에 존재하게 되느냐, 모세와 바로를 들어 비록 사람들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의 존재가 되었지만 그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에 정욕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이방인도 하나님의 계획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며, 정욕으로 말미암은 이방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시려고 할 것입니다.
이 위대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어떻게 단순히 정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여러분의 영혼의 지성이 찬란하게 하나님의 형상의 빛이 비춰준다면 여러분의 지식은 어떨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진리의 지식만을 가질 것입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이 진리의 지식만 가진다면 하나님의 선이 무어인지 알 것이고 그리고 정욕이 일어날 때 여러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만 하고 뒤처리는 생각하지 않은 그런 지식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세상은 저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저를 미워합니다.
왜!
예전에 저도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는 영혼을 가졌었습니다.
그때 저의 영혼이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하는 원인은 그들이 죄를 범하여 저를 이 세상에 있게 하고 제가 이 세상을 수고롭고 고생스럽게 살다가 죽어서도 지옥에 가는 비참한 존재로 살아가지만 이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 의식을 갖지 않은 것에 대해서 더 미워한 것입니다. 우리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고통스런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고 인생 끝에 영원한 지옥을 가지 않았을 것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에 대한 극도의 분노로 인하여 미움을 쏟아내고 분노와 잔인한 살인을 자행하는 야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셨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정욕과 죄를 그리스도에게 씌웠고,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욕과 죄를 죽이기 위해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아주 잔인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더 이상 정욕을 일으키지 못하여 더 이상 지옥 가는 영혼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범죄 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죽인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우리는 이방인을 이 세상에 있게 하나님의 아들의 정욕의 죄책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책임은 범죄하여 타락한 결과로 말미암아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인데 여기에 정욕을 일으켜 이방인들을 낳은 죄책이 더 고통스런 인생을 부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게 되었고,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강령의 말씀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선과 이방인의 작정에 관한 의미에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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