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말하는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정통적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훈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 구별이 없는 사회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합니다. 본래는 선택과 유기로 나뉘어져 있던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논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 접근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보증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이 없는 이 교리가 무엇인지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 11장의 증언에 의하면 구원은 본래 이스라엘을 위하여 보내어진 것인데 이스라엘이 영접하지 않으므로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 넘겨온 것이라고 확실히 증언합니다.(롬11:11~12,30,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여기에는 분명하게 이스라엘과 이방인과의 구별이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공통적인 주장은 이 구별의 시작은 본래 모든 인류가 구별이 없이 하나였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심으로 구별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교리는 선택을 받기 이전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구별 없이 평등했었는데 선택으로 말미암아 나뉘어 졌으며, 이 나뉨이 하나님의 집에서 천히 쓸 그릇과 귀하게 쓸 그릇으로 구별되었다는 해석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이라는 선택과 유기 교리를 정의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선택이전에 이미 선택과 유기는 있었고, 이는 인류의 조상의 첫 사람들 가인과 아벨에게서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선택과 유기의 교리는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아신바 된 것이고 인류의 타락으로 드러날 것이며,이 교리가 가인과 아벨 영혼의 지성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구별이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으로 드러났고, 오랜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더 명확하게 구별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객관적 본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피조물인 사람은 이 구별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의식이 없이 이방인의 편에서는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면 섬기지 않느냐! 라는 종교의 유무로 편이 나뉘었고 종교는 마음의 결단으로 선택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이스라엘 편에서는 종교는 자기와 후손들에게만 선택되어진 특권으로 인식함으로 이로 인하여 이방인들은 자기들과 결코 같을 수 없다는 배타적인 구별의식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같은 본질상 구별이 없는 존재론적인 인간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태에서든지 사람에게서 구별이 드러나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이 그 안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을 최초 사람 가인과 아벨에게 분명히 보여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구별보다 본질상 피조물인 사람에게 비취는 하나님의 은혜는 구별이 없이 주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선택과 유기와는 전혀 구별이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에게 동일하게 제사를 허락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구별이 없이 은혜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과 은혜가 은혜 되도록 나타는 것은 사람에게 이스라엘과 이방인이라는 구별이 있음을 부인하고는 결코 복음을 진리대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곧 하나님의 은혜가 비춰지는 것은 지음을 받은 존재에게 주시는 창조주의 에너지 같은 것 입니다.
이 은혜는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피조물에게 조명되어질 때 나타나는 결과적인 양태는 은혜가 적용되어지는 사람과 적용되어지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창조로 말미암아 계획된 존재인 아벨이나 아담의 존재로 인한 결과적 존재(가인)이라도 은혜 베푸시는 것은 차별이 없지만 은혜의 비췸에 대한 결과적 양태는 피조물이 가지고 있는 지식 (가인과 아벨이 각가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따라 구별되고 그들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났음을 성경이 증언하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개혁교회는 성경이 처음부터 말하는 구별에 대해서 실수로 잘못 적용했든지 아니면 무지했습니다.그리고 이 구별로 인하여 우리에게 요구되는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왜곡 되게 이했습니다.마치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은혜의 비가 고루 비췬다고 말하면서도, 악인에게는 비취지 않고 선인에게만 비췬다고 생각되어졌고 마치 하나님 안에서 인류가 가인과 아벨로 구별된 본질적 존재라는 성경의 가르침음 처음 듣는 것 같았습니다.
더우기 이방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전혀 새로운 지식처럼 들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이미 성경이 너무 많이 말하고 있었고 최초부터 흐르고 있었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의 지성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지식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설령 그들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가지려고 한다해도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진리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가진 자기지식으로 조명하여 이해하기 때문에 반드시 왜곡되게 이해 할 수 밖에 없고 결국은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그신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시기로 작정하심으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성령께서 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조명하면 지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바르게 이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 아담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망실하였고, 하나님에 대한 무지 상태로 자자손손 후손들에게 유전되어 짐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왜곡할 수 밖에 없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감각하거나 지성의 작용에 의해 표상을 가질때 성령께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조명하여 주므로 왜곡되지 않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지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따로 불러 세우시고 약속과 말씀을 지식으로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그럼에도 하나님의 아들에 속한 이스라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여전히 죄의 속성이 그들은 자신 안에 남아 있어 자꾸만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을 밥 먹듯 했고,더욱 악을 행하여 하나님을 떠나 이방인들과 같이 우상을 섬기는 배반을 일삼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죄로 말미암은 결과적인 비참을 그들 자신에게 맡기고 그들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지식을 분명히 주셨기 때문에 결코 핑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그들이 존재를 시작할 때 부터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죄로 말미암은 결과적 존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계획과 작정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죄가 그들 존재의 근원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존재를 허용해 주셨을 뿐입니다.(롬 11장, 엡2장)
창조 계획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그릅과 이방인의 그릅은 존재의 시작부터 명확하게 구별되었고 각각의 지성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유무에 따라 나누어 구별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방인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 자기들의 존재에 대한 비참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 날들이 이미 오래전에 있었고,세상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간의 불확실한 존재적 적대감으로 혼란스런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하나님의 아들들은 죄로 말미암아 상상할 수 없는 극악 무도한 타락의 모습을 연출했고,이방인의 영혼은 자기들의 존재에 대한 비관적 사실 때문에 세상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기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하나님의 아들들과 존재하도록 허용해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적대적인 원수관계가 되었습니다.(골1:21,롬5:10)
가인을 잘 들여다 보십시오.(http://blog.daum.net/godwithus/?t__nil_login=myblog)
가인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아벨을 쳐 죽입니다.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동생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히11:4)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는 것은 명백하게 아벨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대 대한 분노였습니다.
가인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본성적으로 가인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본성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자기 지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고,(이를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성령께서 가인의 영혼을 조명할지라도 가인의 영혼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 음성을 듣고 소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하여 성령의 조명하신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안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새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로마서에서 여러번 언급된 말씀을 다시 반복합니다만 ,여러분의 영은 여러분 안에 있는 여러분이 스스로 생성하여 가진 지식입니다.이 지식은 영혼의 지성에 담겨져 영원히 불멸합니다. 이 지식은 바로 영혼에 있어 영혼으로 지각하게하는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 안에 있는 지식이고 그 지식은 사람의 지식과 같지 아니한 인격적인 삼위일체의 한 위인 성령안에 내재해 있는 지식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곧 육체로서는 지식에 의해 반응하여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행위로 드러내고, 영혼은 육체가 행위를 드러내는 지식을 가진 지성이 있으며, 육체와 영혼 사이에서 전인으로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육체와 영혼은 존재하는 피조물이지만 마음은 두 존재가 결합되었을 때만 형성되는 기관입니다. 육체로만으로 마음을 형성할 수 없고 영혼으로만 마음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육체가 흙으로 돌아갈때 육체안에는 마음이 없어 감각을 가지지 못하며 살아있는 행동을 할 수 없고, 육체에서 불리된 영혼은 자기안에 있는 지식을 지각할 지라도 의지를 발하지 못하므로 자기 존재를 피조 세계에 객관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제와 다른 내용으로 긴 시간을 할애해 왔습니다.
이제 다시 환란에 관한 의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로마서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란은 인내를 8 (롬5:3) (0) | 2015.05.23 |
---|---|
환란은 인내를7(롬5:3) (0) | 2015.05.22 |
환난은 인내를 5(롬5:3) (0) | 2015.03.14 |
환난은 인내를 4(롬5:3) (0) | 2015.03.12 |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며3(롬5:3) (0) | 2015.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