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연구

사람은 다거짓되되 9. (롬3:4)

생명있는 신앙 2013. 6. 27. 09:14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길을 가려면 지식에 있어서 진리를 가져야 하고 진리를 가지려면 지성이 본유지식의 조명을 받아 지식을 생성하고 지각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개혁신앙을 스스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신앙으로 성공주의이 깊이 빠져 있으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주장하며 자신이 청교도 개혁신앙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노선이 개혁주의 신앙이기를 바라는 것과 스스로 확신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앙이 견고하고 확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구원을 항상 주님의 도움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인 개혁신앙이 주님을 잡으려 달려가는 그 신앙임을 믿고 있습니다. 이 신앙만이 참된 진리의 길이기를 소망하고 그것을 의지하여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직 개혁신앙을 잡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개혁신앙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 신앙을 충실히 따르려고 온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개혁신앙인이라고 말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평해주는 것을 기뻐하며 그런 평을 듣기를 원하면서 자칭 개혁신앙인이라는 사람이 지극히 세속주의에 빠진 발언을 서슴치 않고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인 것처럼 말하는 것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신앙에 발을 디디고 함께 속해 있는 것을 자랑삼아 우쭐 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슬픔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는 사도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며 바리새인인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다메색 도상에서 자기들의 십자가에 죽인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커다란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서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면 자기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 아니라는 깨우침을 갖게 되었고 이 깨우침으로 바리새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신적인 강제력에 의한 깨우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환상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논리인지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한결같이 그렇다 하고 동의하며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은 신적 강제력에 의한 자기의 깨우침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개종하는 것이 반드시 신적인 강제력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만남과 같은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통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앙을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사도와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자칭 개혁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그 분도 사도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과 같은 그런 체험을 가진 것이 아닌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에 들어오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그리스도를 거부할 것인가, 하는 갈등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갈등과 혼란으로부터 자기 깨우침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말한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라고 고백한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서 자기 갈등과 혼돈 속에서 자기 깨우침이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기는 믿을 수 없는데 신적인 강제력이 특별한 방법으로 자기에게 임하였기 때문에 자기가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신적인 강제력이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완강하게 하나님을 왜곡하고 부인하며 거절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인류의 첫 사람 가인이 그랬고 노아의 아들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 약속의 아들 이삭의 첫아들에서, 발람,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신적인 강제력에 의한 삶을 경험하였으며, 가까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과 교제하는 삶속에 있었으나, 그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의식적인 신앙만 유지하였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자칭 개혁주의자가 말한 대로 신적 강제력은 바울이 된 사울에게나 자신에게 해당하는 언어로 사용하고 있고 자기의 신앙의 정당성을 변호하는 말로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부르고, 선지자들을 부르시며, 성경의 역사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대언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사명임을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신적인 강제력보다 더 우선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에게 있어서 이런 역사는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고 있었을 때 그의 영혼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수히 많은 량으로 표상화되어 반영되었습니다. 사도는 이 복음들을 자기의 지식으로 조명하여 왜곡된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하나님의 아들들과 이방인의 본성으로부터 나온 거짓된 지식이 하나님의 복음을 조명하여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상태로든 사람은 자기지식으로 진리를 조명하고 지성이 진리를 생성하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가장 이단적인 용어인 자기 깨우침얼마나 미신적이고 하와 적인, 교묘하게 선을 가장한 왜곡된 지식이라는 것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여러분 스스로의 깨우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섭리를 말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뿌리는 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말씀을 온 세상에 뿌린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복음이 뿌려지고 뿌리를 내리면 싹이 돋아나고 생명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복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깨우침을 가지는 왜곡된 주장은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주장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칭의에서부터 어긋난 신학이 되고 있습니다.

자기 깨우침을 가진 사람은 칭의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의 노력과 고뇌와 갈등과 혼란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깨우침으로 얻었기 때문에 자칭 개혁주의자가 말하는 것과 같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사이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발견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이는 자기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종교가였고, 신학자였으며, 철학자였고, 정치가에 입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명예도 있고, 자기의 소속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으며, 자기 의무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들려진 복음은 자기의 환경에서 적용하기에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고 자신의 의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자기같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베드와 같은 어부들에게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자기 판단이 복음을 항상 거절하고 왜면 하였으며 심지어 대적하고 핍박하기 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에는 복음이 지속적으로 반영되고 있었고, 영혼은 자기지식을 조명하여 복음을 비춰 자기지식을 생성하여 자기방식대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가 다메색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자기 안에 있는 복음은 비로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빛에 조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영혼은 그리스도의 빛에 조명을 받은 대로 지식을 생성하게 되었고 이렇게 생성한 지식이 진리의 지식이 되어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진리에 의한 지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고뇌로 깨우친 것이 아닙니다.
백부장은 유대의 한 지역을 관리하는 오늘날의 경찰과 같은 치안을 담당하는 로마의 군인이었습니다.

유대를 점령한 로마가 유대지역에 총독을 두고 총독은 지역마다 백부장을 두고 치안 유지를 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관리가 로마로부터 독립하려는 유대주의 사람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출현과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몹시 바빠졌습니다.

매일 같이 아래 병사들을 시켜 세례요한과 예수그리스도를 감시하고 그들의 동태를 보고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무리를 구성하고 모여든 무리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하여 독립을 주장하는 데모를 일으켜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해서 신경이 곤두서게 되었습니다.

매일 보고를 받고 상부에 보고하며 이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을 때 그의 귀에 들려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병사가 보고할 때 그 보고는 그야말로 순수한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버나움에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는 그가 들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조명되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게 되었고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달라고 소원을 말하며 유대인이 갖지 못한 영예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복음이 들려지고 반영되어져 잔재해 남아 있으면 아직 믿음이 없을지라도 그 반영된 지식을 가지고 주님 앞에 이르렀을 때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을 가진다면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는 우리의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권위에 주어진 선지자와 같은 교사들에 의해 가르쳐 지는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갖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생생한 진리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개혁주의 철학을 말하거나 자기 신앙의 자랑이나 성공주의 신학을 말하기에 앞서 그리스도를 게시하는 진리의 복음이 선포되어지고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아온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얻게 해야 합니다.

이때 그의 영혼에는 이미 들었던 복음을 자기지식의 조명으로 인식하던 것이 사역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그 진리의 복음으로 조명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영혼의 지성은 새로운 지식을 생성하게 되고 이 지식이 전인에서 믿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

이것이 우리가 매일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선포해야 하는 이유인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자칭 개혁주의 신학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의 왜곡된 신앙고백같은 설교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자기자랑이나 신학적인 오만이 가득하고 한편의 설교를 모아 책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사업가적인 마인드를 가진 포장된 개혁주의 설교자들이 넘쳐나고 있고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