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선 사람의 모습을 보이는 법정에서 검사와 판사가 죄를 심리하고 변호사가 죄인을 변호하여 도움을 청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죄의 유무를 심리하는 법정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향하여 죄인이라고 선언한 후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의롭다 칭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주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선언하는 이유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너희는 죄인인데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큰 사랑으로 너희를 용서하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인인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고 사랑으로 받아주시며, 용서하시는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사도가 로마인에게 보내는 로마서의 핵심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의 중심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시고 그 일을 사람에게 전가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하신 일로인하여 죄인이지만 옳은 일을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옳은 것 “Right”“δικη”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더 이상 언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도저히 제 입으로는 언급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말씀을 드릴 수는 있으나 저는 도저히 이 말씀을 제 입으로는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여러분의 상상으로 판단하시기를 정말 간절히 원하면서, 천하고 낮은 죄로 말미암은 정욕의 열매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렇게 낮아지시는 것은 마다하시지 않은 겸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으실 뿐만 아니라 낮아지시기 까지 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권위를 내리시고 판단을 받으신 하나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으시고 진노하시는데 흠이 없으신 낮아지심을 보이셨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로마서 3:4의 언덕을 넘기가 얼마나 어러운 구절인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고, 많은 우리의 선생들이며 개혁교회 신학자 선배들은 이 구절을 얼마나 소홀히 다루고 있었는지 정말 그들의 부끄러움이 저의 부끄러움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부끄러움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신앙을 지켜왔고 완전하게 전수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내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고,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사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개혁교회는 칭의에 대해 언제나 집요한 공격을 받아 왔고 앞으로도 계속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거짓됨과 하나님의 의로우심 때문에 이세상이 존재하는 그날까지 사람 편에선 개혁주의자들이나 혹은 다른 신학자들이 칭의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일어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 구절의 어려움을 말하여 왔고 이어서 계속 말할 것입니다.
right, correct, 은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의롤 곧 옳음이라고 하고 하나님께는 거짓이 조금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사람 지식의 한계를 인식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표현하려는 명제들의 지식에는 완전하게 모든 의미를 함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지식의 한쪽 구석에는 무지와 결함을 함의하고 있어서 말로 표현하는 지식에 대해서 만족할만한 지각을 갖지 않은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옳다’,‘의 자체이시다’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우리의 지식에는 뭔가 더 의미를 덧 붙여야만 의미들이 정확하게 전달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옳음” ‘진짜 옳음’과 같은 부사가 첨가된 언어들을 별도로 사용하며, 하나님은 “정말로 옳다”라는 말들로 확신을 더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런 부사를 사용하는 표현이 옳음의 농도를 더욱 진하게 지각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거짓 때문에 Truth를 표현하지 못하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오늘날 신학계에는 “바울신학의 새 관점”영국 성공회의 더럼주 감독으로 사역하고 있는 톰 라이트의 주장 등으로 인해 떠들썩한 논쟁들이 있습니다. 누가 말한 것처럼 이런 논쟁들이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에게는 이것이 논쟁으로 치부할 일도 아니고 대꾸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지성에서 조명하고 있는 지식이 진리를 이끌어주는 복음의 조명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거짓된 자기지식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인처럼 하나님을 왜곡되게 이해한 것과 같이 그들도 조화되지 않은 자기 신학체계에서 많은 사람들을 왜곡되게 가르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아니하는 사람의 주장이 진리를 낼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들의 신학에는 진리와 성령은 함께 동행하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옳음입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아주 놀라운 말을 합니다. 이 말 때문에 우리는 우리 힘으로 넘을 수 없는 힘든 언덕이 앞에 있음을 발견하고 주님의 도움을 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 집중하며 퍼즐을 맞춰가는 이 수고로움에 여러 퍼즐 가운데 유일하게 들려진 하나의 퍼즐을 들고 맞출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이는 사도가 시편 51:4의 말씀을 인용하여 한 말입니다. 누구는 이 말씀이 뭐 그리 어려우며 사람이 넘을 수 없는 언덕이냐고 반문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언덕앞 에서 주의 도움을 구하며 주께서 나를 업고 넘을 수 없는 언덕을 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도록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죄의식을 인식한 죄인의 고백이고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 고백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비췸을 받고 있는 한 죄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지로 이 시를 고백한 사람은 다윗인데 이 시의 주인공은 다윗을 뛰어넘을 한 사람의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인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편 51편 설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몇 주간 로마서 에서 시편으로 넘어가 설명을 마친 후 다시 로마서를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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